송충이

by 도라지

“철학 공부 그만하고, 재테크 공부나 좀 해.” 아침부터 남편한테 한 소리 들었다. 본인 생각엔 제법 많은 돈을 벌어다 주고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물론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 사전엔 재테크라는 단어는 기재될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껏 두 번의 사업 실패와 소소한 투자 실패로 매월 갚아나가고 있는 은행 빚이 꽤 되건만, 그런 계산은 해보지도 않고 나더러 모아 놓은 돈이 없다고 핀잔만 주고 있는 남편을 보니, 나야말로 억울한 생각이 든다.


남편은 머리 쓰고 돈 계산하는 데는 태생적으로 맞질 않는다. 성질은 급하고 생각이 나면 앞뒤 안 가리고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타입이다. 그래서 젊어서 두 번 사업 실패를 일찍이 경험한 바 있으며, 지금도 나는 그런 남편의 불같은 성격을 다독이면서 차분하게 결정하도록 무진장 애를 쓰며 산다. 일은 다 본인께서 저질러 놓고 뒷수습은 영락없이 마누라 몫이 되기 때문이다.


남편은 현재 두 개의 법인회사를 경영한다. 남들이 들으면 뭐 대단한 사업가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겨우 개인사업자 수준의 회사들이다. 그나마도 한 개 회사는 간단한 경리 업무를 내가 보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소위 재택근무자인 셈이다. 내가 경상대 출신도 아니고 수학경시대회 같은 거엔 출전한 적도 없는 순수한 인문학도지만, 더하기 빼기 정도의 산수 실력과 비교적 꼼꼼함의 덕성까지 갖추고 있다는 점 때문에, 남편은 나를 경리로 채용했다.


그런데 월급은 받지만, 고스란히 생활비로 도로 토해내고 있는 실정이다. 직장에 고용된 자로서 사적 봉급의 자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사장 집의 생활비를 충당시키고 있는 나의 현재 상황을 감안할 때, 오히려 항의해야 하는 쪽은 나일 것도 같은데 우리 집은 거꾸로다. 나는 월급 받고 재테크도 못하는 무능력한 아줌마로 전락되었다.


방사광가속기 오창 유치 소식 때문에 청주 집값이 들썩이고 있다. 이제껏 투자 쪽에선 그 어떤 것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우리지만, 남편은 또 이번만큼은 새로운 각오를 부리나케 단단히 했다는 눈치다. 그래서 아침부터 나에게 모아 놓은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어온 것이다. 젠장, 남편이 벌어오는 돈은 아주 적은 것도 아닌데, 갚아야하고 써야 할 돈은 그것보다 더 많다는 게 웃픈 현실이다. 나는 공연히 죄 지은 기분이 들고 만다.


평생을 간간이 글이나 쓰고 집안 살림만 하면서 크게 돈 벌어본 적도 없는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원대한 계획이나 야망 따위 있을 리가 없다는 걸 남편도 모르지 않는다. 남편 사업체의 단순 경리직과 아파트 동대표 감사 일을 보면서 계산기 두드리는 게 예사인 나이지만, 투자나 재테크엔 나 역시도 젬병이라는 걸 남편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마누라에게 재테크 공부나 할 것이지 하면서 핀잔을 주는 남편을 보니, 약 먹을 때가 됐다는 신호이다.


남편은 심장에 화 기운이 많아서 급기야 공황장애 경계 단계까지 이르렀었다. 짚신 장수와 우산 장수 이야기도 있긴 하지만, 코로나 이후로 사업이 잘 되는 사람은 소수일 것이다. 남편의 사업도 지장이 없지 않았으니, 아침부터 공연히 마누라 잡는 것도 다 코로나 때문일 거라고 그렇게 나는 나에게 둘러댄다.


어릴 적부터 다니던 한약방 아저씨께(연세가 팔순 가까이 되셨지만, 그래도 내겐 아저씨다) 전화를 드렸다. 오후에 한약 가방을 들고 집에 오는데, 다급하고 실망에 찬 목소리로 남편이 전화를 걸어 왔다. 청주지역이 부동산 거래 규제지역으로 지정됐다는 것이다. 갭투자를 막기 위해서 정부가 발표한 방침이다.


그 소식을 전해 듣는데, 엘리베이터에 비친 내 얼굴에 슬며시 미소가 번진다. 도서관이나 들락거리며 책이나 파먹는 송충이로 올 한 해는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도 같다.


(2020년 6월 17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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