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랑 칸트랑

by 도라지

우리 동네는 1495세대가 콘크리트 건물 안에 살고 있다. 속칭 "명품아파트"라고 버젓이 광고하면서 집값 올리는 데 관심들도 많아 보인다. 거시기 알 두쪽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도 있지만, 흙수저 중에도 막 흙수저로 태어난 남편과 결혼할 때 남편이 가진 것이라곤 정말이지 딱 그거 두쪽뿐이었다.


그렇게 맨바닥부터 시작한 남편이, 남들 다 가지고 있는 어엿한 직장인 마누라의 조력도 없이 혼자 돈 벌어서 가끔 날리기도 하면서 소위 명품아파트(대형 평수도 아니고 34평이다. 은행 빚도 있다)까지 입성했으니, 내 시선에선 비교적 우수한 인생 성적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다음 생에 기필코 다시 만나고 싶은 인연은 아니다.


내가 우리 동네를 좋아하는 건 TV진품명품 쇼에나 어울릴법한 그런 이름값 때문이 아니다. 드넓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산책하기 좋은 부모산이 바로 동네 앞에 있고, 현란한 네온사인이 없는 한적한 밤 풍경이 병풍처럼 있어서다. 누군가 야간근무를 마치고 새벽에 귀가한다면, 아침 햇살 따라 아파트 정원으로 몰려드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차단할 방책을 마련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파트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근린공원의 작은 숲과 이어져 있는 가든 안에는 작은 물길들이 조성되어 있다. 물가를 찾아오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이 하루 종일 쫑알거리며 번갈아 드나든다. 한가로이 소파에 누워 그 소리를 듣고 있자면, 고대인지 원시인지 분간이 안 되는 아련한 시절로 회귀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런 기분을 칸트가 말하는 순수 취미 판단으로 해석해도 될는지는 모르겠다.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건 그리 멀리 나가야 할 일도, 돈이 따로 드는 일도 아니다. 나는 그렇게 가끔 미학적 인간이 되어 본다.


오늘은 책상 앞에 앉아있지 말고 산에나 올라가야겠다고, 어젯밤에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들었었다. 새들이 수선스럽게 재잘거리는 소리에 오늘 아침 잠을 깼을 때만 해도 같은 생각이었다. 며칠 전 새로 산 바지를 처음 입고 출근하던 남편이 내 앞에서 앞뒤 돌아 보이며 자기 몸매 자랑을 하다가, 갑자기 신축성 테스트를 한답시고 나를 향해 발차기 자세를 취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태생이 레지스탕스 기질인 나는 그런 시늉에도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인다. 순식간에 양손에 들려있던 망고와 과도를 내려놓고, 남편한테 배운 그대로 옆차기와 앞차기 동작을 바꾸어 가며 남편 앞으로 돌진했다. 깡충깡충 고작 몇 스텝 뛰었을 뿐인데, 왼발 아킬레스 쪽이 시큰거린다. 나이 먹어서 공부한답시고 운동은 안 하고 쭈그려 책상 앞에 앉아있던 날들이 길었던 탓이다. 안 쓰던 근육이 놀란 것도 당연하다. 역시나 공부도 젊어서 하는 게 맞나 보다.


결국 오늘도 산에 가지 못하고 발목에 붕대 감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지금은 공부하는데 특별한 목적도 없다. 공부가 꽤 됐을무렵, 논문을 써도 되겠구나 싶으면 쓰고 싶긴 하지만, 딱히 논문을 쓰기 위해 공부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나는 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영문과 나와서 영어로 말 못 하는 게 철천지 한이듯이, 철학과 대학원까지 공부했다고 하면서 칸트도 설명 못하는 게 한이 됐다 보다.


나는 지금 엉금엉금 칸트를 읽는다. 수십 년 영어 공부하고 드문드문이라도 영어로 말을 하듯이, 언젠가 칸트는 이런 사유를 했노라고 후배들에게 한 두 마디라도 말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영어가 수십 년 걸리니, 철학도 수십 년 걸릴 것 같다. 그럼 내 나이 칠십은 돼야 칸트를 이야기할 수 있으려나?


그때도 칸트가 흥미로워야 할 텐데, 그걸 장담할 수가 없다. 한 치 앞의 삶도 장담할 수가 없는 일이니 말이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겨우 두쪽 읽었는데, 벌써 눈이 시큼시큼해진다.


(2020년 6월 19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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