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내 신상에 변화가 생기면, 나는 그것을 "이야기"로 팔아먹는다. 어디에 글을 써서 원고 값을 받는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마다 우연히 운명적인 관계가 있는데, 나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아주 재밌어하는 한 사람이 내게 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팔아서 밥과 술을 얻어먹곤 한다. 그녀가 밥을 다섯 번 사면 내가 겨우 한번 살뿐이지만, 그녀는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 값을 매번 후하게도 쳐준다.
어찌 보면 그건 조건 없는 사랑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 값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시시한 아줌마의 신상 변화나 주변에 관한 이야기가 재밌으면 얼마나 재밌겠는가.
그저 그녀가 나를 동생처럼 귀엽게 봐주고 있다는 걸 나도 모르지 않는다. 서로 다 알면서도 여전히 나는 내 이야기를 팔아서 밥을 먹고, 그녀는 맛있는 밥값을 지불한다.
그녀는 연금이 나오는 해를 기점으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중년의 삶을 여유롭게 누리고 있는 중이다. 나와는 띠동갑으로 돈도 많고 땅도 많다. 그런데 그녀가 삼 년 전쯤 우연히 시작한 주식에서 재미를 보더니, 여전히 주식을 하고 있단다.
나도 늙었는데 나보다 더 늙은 언니가 컴퓨터 앞에서 주식을 팔아서 번 돈으로 그녀보다 어린 동생의 밥값을 지불하는 형세가 되었으니, 이쯤 되면 밥을 얻어먹는 나의 심기도 그리 편치만은 않을 법하지 않은가.
그런데 참으로 요상한 것은 내가 이야기를 팔아먹으려고 전화를 할 때쯤엔, 언제나 그녀가 좋은 값에 주식을 팔았을 기막힌 타이밍이라는 거다.
오늘도 모처럼 팔아먹을 이야깃거리가 있어서 전화를 했더니, 바로 삼십 분 전에 주식을 팔아서 두둑하게 지갑을 채웠노라고 그녀가 자랑을 한다. 그래서 나는 내일 또 밥을 얻어먹기로 했다.
산다는 게 그런 거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사는 것, 함께 어울리는 것, 그게 삶이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분명해지는 건, 서로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 사람과 어울리는 자리는 구태여 만들고 싶지 않다는 거다.
혼자 있으면 이야기가 생겨나지 않는다. 이야기에 등장인물이 필요한 것처럼, 내 삶의 이야기도 사람들 속에서 생겨난다. 내게 밥을 잘 사 주는 언니 역시 내 삶의 이야기 중 한 부분인 것처럼, 나도 그녀의 삶 가운데 재밌는 하나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아파트 동대표를 때려치웠다. 정의로운 열정에 가득 차서 시작했던 일의 복병은 역시 조직 내 사람이었다. 인사가 만사라 했던가. 조직이 내부적으로 분열되면서 내 입장이 난처해지는 통에, 여러 날 고민하다가 고작 반년도 못 채우고 일을 그만두었다. 그 일을 하면서 남편 회사 일을 오히려 등한시하는 꼴이 되었기에, 지난 몇 달 동안 남편의 안색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던 것 같다.
남들이 들으면 뭐 대단한 나랏일 하는 것도 아니고 겨우 동대표 일을 하면서 유난스러우냐 하겠지만, 일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제대로 하고자 한다면, 온 정신을 다 쏟고도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게 일이다.
내일 언니를 만나면 동대표 이야기를 팔까 한다. 글이든 말이든 그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기에 내 이야기는 자칫 투박하고 딱딱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런 내 이야기를 고급 식당에서 사겠다 하니, 그 또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이야기에 양념을 칠 수도 없고...
아마도 그녀는 투박한 내 이야기를 사는 게 아니라, 우리가 함께 나누는 시간을 사는 것일 게다. 즐거운 시간을 미래에 남겨두고자 하는 것처럼 바보 같은 계산은 없다는 걸 그녀도 알고 있다.
(2020년 7월 9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