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우연히 수현을 재회한 검은표범은 변명과 회한을 가득 늘어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검은표범은 사제복을 벗고 속세로 돌아온 이후로 수현을 다시 찾지 않았다.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도 돌아가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이후로, 검은표범은 이년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는 많은 곳을 다녔고 적지 않은 여자들을 만났다. 종교에 갇혀있던 그에게 세상은 무수한 여자들로 가득한 곳이었다. 검은표범은 그제야 세상의 비밀을 알 것도 같았다. 세상은 수컷들과 암컷들의 짝짓기와 번식을 위한 서사시에 불과했다. 종교도 예술도 정치도 지향하는 것은 하나였다. 위대한 인류의 업적이란 결국 자연세계에서 퇴출당하지 않으려는, 종족 보존을 향한 길고 긴 여정일 뿐이었다. 사람은 죽어도 인류는 지구 상에 보존되어야 한다는 유전자의 갈망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다.
연우의 작업실에서 수현과 삼십여 분의 재회를 하고 검은표범이 작업실 문을 닫고 나갔다. 이십여 분이 흐르고 나서, 다시 누군가 연우의 작업실 벨을 눌렀다. 수현이 문을 열고 이연우 작가의 부재를 전달하자, 해리포터는 그대로 돌아갔다고 했다.
연우가 해리포터에게 어제저녁 작업실에 다녀간 이유를 묻자, 해리포터가 연우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던지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늘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작품 속에서나마 제 외모를 좀 멋있는 놈으로 바꾸어달라고, 그걸 요청드리려고 찾아갔어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지금처럼 솔직하게 부탁드리기가 부끄러워서요."
연우는 해리포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상상 속에서라도 자신의 아름다움을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작업실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삼 개월 동안 매주 화요일마다 연우는 릴리와 작업실을 오고 갔다.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작업실을 다녀간 세 명 중에 마지막 민들레의 고백이 연우는 몹시도 궁금했다. 영상 속에서 민들레는 해리포터처럼 연우의 부재를 알고 금방 돌아가지 않았다. 민들레는 연우에게 무슨 요청을 하려 했던 것일까? 수현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던 것일까? 드디어 민들레가 그의 마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생각들을 좇으며 말했다.
"제가 작업실에 도착한 시간은 아홉 시쯤이었던 거 같아요. 저녁을 먹으며 술을 한잔 했거든요. 저는 적토마님이 파란하늘님과 실제로 연인 관계가 되었다는 걸 알고 있어요. 이미 작품에서도 작가님은 파란하늘과 적토마가 결혼하는 걸로 소설을 끝맺으셨잖아요. 실제로도 두 사람은 결혼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요... 저도 적토마를 사랑해요. 어제저녁엔 작가님과 솔직하게 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갔어요. 그런데 작가님은 안 계시고 친구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분을 뵈니, 작가님께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똑같이 나오더군요. 솔직하게 제 이야기를 했어요. 그분은 진심으로 제 이야기를 경청해주셨죠. 그리고 사랑은 어떤 것이든 다 아름답다고 말해주셨어요. 사랑을 원하는 사람에겐 진짜 사랑이 찾아온다고도 하셨죠. 정말 감사했어요."
다섯 명의 독자들이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또 한 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민들레는 독백을 마치고,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기다랗고 하얀 열 개의 손가락들이 민들레의 홀씨처럼 그의 얼굴 위에서 흩날렸다. 오전 열한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연우는 이미 예측했던 일이었기에 전혀 놀라울 게 없었다. 적토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그 땅바닥에 한 송이 노란 민들레꽃이 가련하게 피어있는 것 같았다. 사랑의 운명 앞에 무방비로 드러나는 가엾은 존재.. 이런 독백을 듣기엔 너무 환한 시간이었다. 차라리 깜깜한 밤이었으면 좋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