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육인야화 18화

(소설) 육인야화 18

by 도라지

여섯 명의 독자들이 다시 릴리에서 연우와 마주했다. 4월 4일 첫 모임 때처럼 독자들의 얼굴에는 긴장하고 있는 모습들이 역력했다. 그 긴장 속에는 '우리들 가운데 범인이 있을까?'라고 묻는 호기심들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소리에도 매우 민감한 것만큼이나, 연우는 사물의 움직이는 모양과 동작의 흐름마저 무척 예민하게 포착하는 편이다. 지난밤 모니터 속의 범인의 몸선과 동작은 이제껏 본 적 없는 사물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걸음걸이, 손짓과 몸짓이 연속되는 모양들, 대화를 나눌 때 흐트러지는 몸 선들 속에는, 그 사람을 정의하는 그만의 독특한 특징들이 있다.


범인이 작업실에 들어와서 와인병을 집어 들고 내리치는 연속 동작의 그 과정이 연우의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필름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연우는 이들 가운데 범인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중이다. 연우가 말문을 열었다.


"오전 시간에 선뜻 나와주셔서 우선 감사드립니다. 며칠 전 우리는 이 자리에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요, 지난밤 제 작업실에서 살인미수로 보이는 매우 유감스러운 사건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제가 카메라에 찍힌 영상을 살펴보았더니, 여기 계신 여러분 가운데 세 분이 제 작업실을 방문하셨더군요. 경찰 역시 지금 cctv를 분석하고 여러분의 신원은 곧 확인될 것입니다. 저는 경찰 조사에 앞서 진실을 알고 싶어서, 급하게 여러분을 다시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범인은 여기 계신 분 중에는 없는 걸로 보입니다. 다만, 세분께서 왜 제 작업실에 방문했던 건지, 그 이유를 자발적으로 솔직하게 말씀해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때 호랑이가 물었다.


"작가님 작업실에서 발생한 사건이라 했는데, 누가 피해자인 겁니까?"


"제 친구입니다. 그녀를 저로 오인한 것일 수도 있겠죠.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고 생각 중입니다."


그러자 검은표범이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가로챘다.


"제가 작가님 작업실에 저녁 일곱 시 삼십 분 무렵 방문했습니다. 육인야화에 묘사된 저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렸거든요. 물론 제가 스스로 제공한 이야기였지만, 이건 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천주교 전체에 관한 훼손으로 독자들에게 비칠 것이 두려워졌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수정해달라는 부탁을 드려보려고 작업실을 방문했습니다. 지난번에 작업실 건물 앞에서 작가님을 만난 적이 있지 않습니까.. 1층 편의점에서 4층으로 올라가신 걸 보고, 작업실 위치를 알았죠."


기억이 난다, 그 밤에 으스스한 검은표범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서, 수현이 하얀 돛단배를 타고 떠나던 슬픈 꿈을 꾸었다. 검은표범이 물이 담긴 컵을 왼손으로 집어 들고 물을 벌컥 마셔버린다. 다시 이야기를 계속했다.


"불이 켜져 있는 작업실에 올라갔는데, 작가님은 계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거기에 그녀가 있었어요. 제가 첫 섹스를 나눈 여자요."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다른 독자들이 모두들 놀라는 표정을 짓는 속에서, 자그맣게 탄성이 새어 나오기도 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연우였다. 십오 년 동안 수현을 만나면서, 단 한 번도 수현의 입에서 나온 적이 없던 얘기였다. 수현이 서른넷에 운명처럼 사랑했다는 남자가 검은표범이었구나.. 그 둘이 만날 당시에 그가 사제였기 때문에 수현은 그의 비밀을 지켜주고 싶었던 것이다. 벌써 십칠 년 전에 헤어진 인연이었다.


검은표범은 어두컴컴한 고해실에 무릎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의 비밀스러운 죄를 털어놓는 연약한 한 인간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도 한때는 고해실 의자에 앉아서, 얇은 장막 사이로 들려오는 신자들의 죄를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사해주는 신부의 직분을 수행한 적이 있었다.


수현과의 재회는 검은표범에겐, 그가 지은 죄에 대한 상기의 의미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우가 알고 있는 수현은 그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우는 병실에 누운 채 깨어나지 않고 있는 수현의 깊이 잠든 의식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다시 처량한 침묵이 세미나룸을 가득 채웠다. 운명을 이기지 못하는 인간들의 서글픈 자화상들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얼굴들 속에 들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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