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토마의 눈빛과 파란하늘의 눈빛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찰나의 시간 속에 부딪혔다. 연우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만나는 것을 보았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눈을 통하여 이루어내는 '마주함'은 얼마나 황홀한 경험이며 경이로운 일인가? 신을 닮은 영혼을 가진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이란, 바로 이런 '눈빛의 언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연우는 남녀 간에 나누는 섹스의 환상보다 눈빛으로 교감하는 환상이야말로 더 쾌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오묘한 존재인가? 신도 인간만큼 오묘할 수는 없을 거라고 연우는 생각한다. 사람은 입으로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눈으로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연우는 순간적으로 '무'의 환상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한 순간 속에서 잠시 부딪히는 시선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다시 '무'로 돌아간다.
두 남녀의 시선의 부딪힘을 연우만 알아챈 것은 아니다. 민들레는 여전히 잔잔한 시선으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주에 파란하늘이 적토마의 머스탱을 타고 릴리를 떠나는 모습을 민들레도 목격했다.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갔을 공간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민들레는 상상하고 싶지가 않았다.
릴리에서 민들레는 늘 적토마의 옆자리에 앉았다. 파란하늘은 줄곧 적토마의 맞은편에 앉곤 했다. 이야기 속에서 적토마와 파란하늘의 섹스신을 좌절시킨 것도 파란하늘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걸 질투해서가 아니었다. 적토마가 민들레가 아닌 다른 여자랑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
릴리에서 처음 적토마를 본 순간부터, 민들레의 연모는 아무도 모르게 시작되었다. 남성 독자들이 파란하늘을 바라보며 열광할 때, 민들레는 적토마를 향해 혼자서 피어나고 있었다.
그날따라 모두에게 비처럼 내려앉은 나른함은, 독자들로 하여금 스토리를 전개할 의지들을 빠르게 소멸시켜갔다. 모두들 다음 주에 만날 것을 약속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파란하늘과 적토마는 그 밤과 그다음의 화요일 밤마다 함께 차를 타고 호텔로 들어갔다.
일주일이 흐르고 또 일주일이 흐르는 사이, 화요일마다 남성 독자들은 파란하늘이 적토마와 나누는 사랑 이야기를 훼방하느라 급급했다. 민들레 역시 적토마가 파란하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도록 막는데 열의를 다했다.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란하늘과 적토마의 애정 행각을 알면서도, 이야기 속에서만이라도 적토마와 파란하늘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기를 지독히도 바라고 있었다.
독자들의 스토리텔링은 점점 지루해지고 모두들 지쳐갔다. 결국 어떠한 러브스토리도, 충족된 환타지의 결말도 내지 못한 채, 뒷 이야기는 연우의 몫으로 넘겨지고 있었다.
릴리에서 독자 모임이 흥미롭지 않게 석 달을 채워갈 무렵, 파란하늘이 민들레의 산부인과에 진료를 받으러 내원했다. 민들레에게는 없는 자궁과 유방을 파란하늘은 가지고 있다. 민들레는 자신에게는 없는 자궁 때문에 산부인과를 전공했었다.
자궁을 가지지 못한 남자의 몸으로 태어난 여자 민들레 앞에서, 자궁을 가진 여자 파란하늘이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었다. 임신이었다. 민들레는 정자의 제공자가 적토마일 것을 짐작한다.
"임신 7주 차입니다."
민들레는 다른 산모들에게 의례적으로 건네는 '축하드립니다'라는 인사말을 파란하늘에겐 하지 않았다. 대신에 "낳으실 거지요?"라고만 물었다. 파란하늘은 한편 기쁘면서도 한편 난처한 표정을 동시에 지어 보였다.
그리고 얼마 뒤, 연우의 작업실에서 수현이 정체 모를 괴한의 습격을 받고 쓰러졌다. 뜨거운 여름밤들이 시작될 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