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육인야화 14화

(소설) 육인야화 14

by 도라지

검은표범의 사랑의 독백을 들으며, 방금 전 표독스러웠던 파란하늘의 얼굴빛이 누그러들었다. 적토마와의 호텔방 이야기를 빼앗아간 검은표범에게 앙칼지게 굴던 여자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검은표범이 들려주는 그녀를 향한 찬미 소리에 흠뻑 젖어있는 얼굴이다.


그래서 결국 네 번째 모임날, 파란하늘은 다른 독자들의 방해로 적토마와 호텔로 들어가는 이야기에 도달하지 못했다. 불발된 섹스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을 현실에서 실현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파란하늘은 생각한다. 검은표범과 해리포터는 여전히 날카롭게 곤두서 있는 얼굴로 사람들과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적토마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파란하늘을 기다리며 벚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피운다. 보름달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남자는 섹스를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떠올랐다. 여자의 음기가 강한 날이라 피하는 것이 좋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래서 오늘따라 파란하늘이 유난히 호텔 이야기에 적극적이었던 걸까, 적토마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생각해본다. 여자의 음기가 강하면 밤이 더 뜨거워질 텐데, 그러면 더 강렬해서 좋지 않을까 반문해보았다.


"파란하늘님, 기다리고 있었어요. 우리 못다 한 이야기를 마저 마무리해보는 건 어떨까요?"


파란하늘도 기다렸던 바다. '좋다'라고 대답하기도, '그럴까요?'라고 대답하는 것도 적당해 보이지 않는다. 파란하늘이 말없이 적토마의 옆으로 가서 그의 팔을 잡았다. 토요일 오전이 아니라 화요일 밤에 파란하늘이 적토마의 머스탱을 타고 호텔로 들어갔다.


지난주에 스토리텔링 속에서 이미 그들은 키스를 나눈 사이였다. 호텔방의 문이 닫히고, 적토마의 뜨거운 숨결이 파란하늘의 입 안에서 불을 뿜었다. 질주하는 한 마리 말처럼 적토마의 남성은 그녀의 몸 위에서 쉬지 않고 달렸다. 보름달이 뜬 밤에 야생의 숲을 누비는 한 마리의 거친 명마였다.


이튿날 아침, 커튼 틈으로 들어오는 찬란한 햇살에 파란하늘이 눈을 떴다. 적토마가 그녀의 옆에 누워있었다. 하룻밤 새 세상이 온통 달라진 것 같았다. 새로운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모든 게 신비로웠다. 거대한 마법의 밤이 지나고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연우는 어젯밤 적토마의 머스탱 속으로 파란하늘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육체의 축복을 받은 아름다운 커플이라고 생각했다. 연우는 영혼과 육체가 같은 물질로 빚어진 것임을 믿고 싶어 진다.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어있을 것도 같았다.


범준과 수현이 연우의 작업실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연우가 혼잣말하듯이 나직하게 말했다.


"소설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종교인 하면, 어느 집단이 떠올라?"


범준이 예리한 눈빛으로 대꾸했다.


"독자들 중에 전직 신부라도 있는 거야?"


"그런 거 같아서."


"그게 뭐 대수라고? 나도 목사 될 뻔한 놈이잖아. 차라리 땡중이 더 어울렸겠지만.. 하필 왜 그때는 신학과에 가고 싶었던 건지, 그게 미스터리란 말이야. 고등학교 때 존경했던 교장선생님 영향이 크긴 했지. 그분이 그 대학 신학과 출신이셨거든."


범준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고등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을 꼽는다. 범준은 의외로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한 사람이었으며, 명문대 신학과 재학 시절에도 그 대학의 그 어렵다는 장학금을 4년 내 다 받고 다녔다. 아버지가 스무 살 차이 나는 젊은 여자 결혼을 하면서, 범준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그의 어머니를 부양하고자 마음먹었다.


"연우씨, 종교인의 직업을 너무 색다르게 볼 건 없어. 거기에 섹스의 문제를 따로 차감할 필요도 없고. 인류의 역사 속에 종교가 있을 뿐이라서. 종교인을 예외적 시선으로 분류해서 너무 가혹하게 취급하지 말아 달라는 얘기지. 그거야말로 비윤리적인 행위일 거야."


모든 인간을 향한 범준의 생각은 성별과 나이, 직업과 종교 상관없이 언제나 똑같은 저울에서 판가름된다. 종교와 도덕은 태생이 달랐다. 간혹 그 둘을 같은 것으로 보는 오류가 있을 뿐이다. 섹스는 종교의 저울 위에, 혹은 도덕의 저울 위에 올려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무한한 상태 위에 올려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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