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육인야화 15화

(소설) 육인야화 15

by 도라지

릴리에서 독자들과 모임을 하고 온 다음날부터 그다음 주 화요일 저녁이 오기까지, 연우는 쉬지 않고 글을 썼다. 대학 시절 어느 교수님이 <귀하는 장차 글쓰기로 먹고살아도 될 것입니다.> 라고 페이퍼 위에 써주셨던 예언은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연우는 말보다 글이 쉽다. 소리의 공허함보다 문자의 영속성에서 연우는 위로받는다.


모임 때마다 테이블 위에 켜 두었던 녹음기에는 찻잔이 딸그락거리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누군가 의 웃음소리, 여러 독자들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잠시 나누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여러 가지 소리들이 혼합되어 공기 속으로 떠다니는 것을 들으며, 소리만으로도 독자들의 몸짓과 표정들의 변화가 눈앞에서 보이듯이 되살아났다. 시간 속에 흘러 다니는 소리를 담아왔을 뿐인데, 이미 사라진 시간이 무대 위 연극처럼 재현되고 있다. 시간은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연우는 기억 속에 저장된 시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다.


다섯 번째 모임날, 파란하늘은 은은한 펄감이 감도는 핑크빛의 점프슈트 차림으로 릴리에 나타났다. 투명한 피부톤을 가진 파란하늘의 우아한 매력이 끝도 없이 발산되었다. 그녀를 향한 남성 독자들의 갈망을 꽁꽁 묶어놓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같은 빛깔의 벨트가 감싸고 있었다.


네 번째 모임까지 이야기에 한 번도 참견하지 않았던 민들레가 조용히 손을 들었다.


"다른 독자님들은 모두 이야기 속에 이미 한 번씩은 등장하셨는데, 아직 제가 들어가 보질 못해서요. 오늘은 제가 스토리텔링 해봐도 될까요?"


이미 남성 독자들의 마음을 다 움켜쥐고 있는 파란하늘이, 아직 확인되지 않은 민들레의 심리가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찬성합니다"라고 하이톤의 설레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내재된 영혼과 상관없이 인물로만 본다면야, 민들레는 적토마 못지않게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다. 적토마에게선 볼 수 없는 겸손함과 따뜻함마저 갖고 있어서, 그가 여성이 되기를 희망하는 남자가 아니라면, 그 역시 멋있는 남성임에 틀림없다. 민들레가 낮고 차분한 음성으로 머뭇거리지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적토마의 붉은색 머스탱과 검은표범의 국산 차가 부딪힌 접촉사고는 심하지 않았다. 살짝 닿은 정도였다. 적토마는 파란하늘이 뒤 차주를 '신부님'이라고 호명하는 소리를 듣고, 쿨하게 접촉사고는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검은표범을 한눈에 알아본 파란하늘 앞에서, 검은표범은 자기가 더 이상 신부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러자 파란하늘은 그녀는 별거하며 혼자 지낸다는 말을, 외로운 여인이 무심결에 넋두리하듯이 내뱉었다.


파란하늘이 웃음을 흘리며 검은표범과 전화번호를 주고받는 모습을 적토마가 지켜보았다. 갑자기 여자에게 흥미가 사라진다. 이상하다. 접촉사고가 나기 전까지 적토마는 온통 파란하늘과의 섹스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파란하늘의 몸이 그냥 물질덩어리처럼 느껴진다. 수컷을 찾아 헤매는 한 마리 암컷처럼 보인다. 나를 보며 지었던 암컷의 눈웃음이 또 다른 수컷에게로 향해 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이 차올랐던 욕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적토마가 파란하늘과 검은표범을 향해 말했다.


"두 분이 아주 오랜만에 해후하신 것 같은데, 가까운 카페로 가서 차라도 한잔 나누시는 건 어떨까요?"


파란하늘이 고양이의 꼬리처럼 눈꼬리를 말아 올리며 대꾸했다.


"그러세요, 신부님~ 호칭은 차차 고쳐볼게요."


그렇게 세 사람은 카페로 이동해서 함께 차를 마시고 점심 식사까지 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헤어졌다.>


민들레가 구술한, 적토마와 파란하늘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헤어지는 장면 묘사는 시시했다. 민들레 역시 이야기 속에서 파란하늘이 누군가와 섹스를 즐기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가 않은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섹스 장면 묘사에 대한 부담감 때문일까? 이쯤에서 적토마와 파란하늘은 호텔방으로 들어가 열정적으로 섹스신을 연출하는 장면이 나왔어야 했다. 적토마와 파란하늘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좌절시킨 민들레의 심리를 연우는 도저히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이야기 속에서 파란하늘이 그 누구와도 아직 섹스를 하지 못한 것에 모두들 마음을 놓은 것인지, 재미없는 이야기에 시들해진 건지, 여섯 명의 독자들 표정이 나른했다. 적토마와 파란하늘이 나른하게 평화로운 독자들 틈에서, 둘이서만 아는 은밀한 눈빛을 교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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