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육인야화 20화

(소설) 육인야화 20(최종회)

by 도라지

누군가 살해의 위협을 당해서 쓰러지고 나서야, 독자들은 스스로 범인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의 감추었던 욕망과 비밀들을 단숨에 토해냈다. 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은 비밀이래야 외모 콤플렉스와 동성애, 수컷의 욕망에 불과했지만, 수천 년 묵은 인류 본성의 기억들을 그들은 혼자서 비밀스럽게 지니고 있었나 보다.


그들의 고백을 들으며, 연우의 몸속에서 오래된 인류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질투하고 미워하고 욕망하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사랑하는 이 모든 인류의 기억들이 혈류를 타고 빠르게 몸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범인은 스스로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다. 수현과 범준이 몇 달 전부터 새로 사귀고 있는 여자의 헤어진 애인이었다. 그 남자는 그의 여자가 수현과 범준과 어울리면서 자기를 버리고 떠났다고 믿고 있었다. 여자에게 가했던 그의 폭행이 여자가 떠나간 진짜 이유였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서를 꾸미던 경찰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 전 애인이 한 남자와 어떤 여자와 함께 1:2 섹스를 즐겼다는 거지요? 그들과 어울리면서 당신의 전 애인이 당신을 버리고 떠났고요~ 당신은 홧김에 그 세 명이 자주 어울리곤 했던 어느 작가의 작업실에 찾아간 거네요. 거기 위치는 어떻게 알았어요? 헤어지기 전부터 애인을 미행했었던 거로군요. 그런데 1:2 섹스하는 걸 당신이 직접 봤어요? 어떻게 하던가요?"


범인이 살인 혹은 상해의 고의성을 가지고 작업실을 갔던 것인가의 여부보다, 경찰은 1:2 섹스의 체위와 동작들을 더 조사하고 싶어진 모양이었다.


범인이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는 동안, 병실에 누워있던 수현도 깨어났다. 수현의 옆에는 범준과 연우가 있었다. 수현이 그녀의 의식 속에 갇혀 있던 보이지 않는 강력한 기억의 적과 싸우고 돌아온 시간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수현은 어제저녁 십칠 년 전 헤어졌던 슬픈 사랑의 기억을 마주하고 처참하게 무너졌었다. 잊어버렸거나 다 회복됐을 거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하지만,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난 수현이 이렇게 말했다.


"그를 향한 기억들이 나를 뒤엎어버렸어. 나는 아직도 그 남자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던 거야."


흐느끼듯 조용히 읊조리는 수현의 누운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출렁거렸다. 범준이 검은 옷을 입은 사제처럼 경건하고 다정하게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아주며, 그의 신비한 말씀을 쏟아 내었다.


"당연하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몸으로 나눈 것들 속에 정신이 살아있는 거야. 몸이 원하는 게 곧 마음이 원하는 거겠지. 원하는 대로 하면 돼~보고 싶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고, 만지고 싶으면 만지고 싶다고 말해.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야."


범준의 시시한 말들처럼, 신비한 것들은 원래 시시한 것들 속에 들어있다. 육체 안에 갇힌 인간의 운명 앞에서, 연우는 늘 불멸의 정신을 향해 도약해야만 하는 것으로 배워왔다. 도약의 부질없음과 거짓을 범준이 가르쳐주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대의 육체를 갈망하는 호르몬 작용에 불과한 것이라지만, 이별의 고통과 상처는 영혼에 남는다. 수현의 말처럼 그 또한 몸으로 기억하는 흔적 같은 것이겠지만, 죽은 이를 다시 볼 수 없는 줄 알면서도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죽음에 대한 이해를 하고도 그리워하는 존재, 인류의 신비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해보겠다던 연우의 프로젝트는 실패도 성공도 아니었다. 연우의 상상력과 조합하여 완성된 <육인야화>는 인터넷 검색어 1위에 등극했다. 수현과 범준은 여전히 친구이며, 수현은 검은표범과 오래 전에 멈추었던 연애를 다시 시작했다.


9월의 어느 날, 웨딩드레스 아래 아주 조금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파란하늘이 바다가 보이는 성당에서 적토마와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 신부를 포함한 여섯 명의 독자들과 연우가 결혼식장에서 다시 만났다. 푸르른 하늘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이었다.


연우는 바다의 물빛보다 한톤이 낮은 스카이블루 쉬폰 원피스를 입었다. 길게 늘어뜨린 물결 모양의 머리카락이 연우의 어깨 뒤에서 찰랑거렸다. 호랑이는 여전히 목을 빳빳하게 세우며 크게 웃었고, 민들레는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고 한결 자신감 있는 여자처럼 행동했다. 연우의 옆에는 키가 작은 해리포터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모든 존재들이 공존의 신성함 속에서 생명을 되찾은 것처럼 평화로운 한낮이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 위로 갈매기들이 한가로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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