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드 아이 7

by 도라지

민재가 먼저 병원을 나와서 지하 주차장에서 하은을 기다렸다. 조무사는 병원 내 서열에서 말단이라서, 하은은 병원 문까지 잠그고 마지막으로 병원 문을 나섰다.


물론 하은보다 나이도 어리고 여기 근무 경력도 짧은 다른 조무사들도 있지만, 하은은 이 병원 개원이래 줄곧 마지막으로 전깃불까지 소등하고 문을 잠그고 퇴근하는 것을 자기 일처럼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른 조무사들이 그런 하은을 '언니'라고 부르며 잘 따랐는데, 오늘 아침 민재와의 관계가 들통나고부터 모두들 하은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하은은 크게 신경 쓰이거나 속이 상하지 않는다. 천성이 느긋한 데다 하나의 사태에 대하여 골치 아프게 생각하도록 태어나지를 않아서, 하은은 마흔일곱이 되도록 미래를 걱정하거나 미리 근심하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결혼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민재를 만나기 전에 남자를 세 명 사귄 적은 있지만, 분명한 이유도 없이 세 명 다 하은을 떠나갔다. 하은은 이제 그런 상황에도 크게 이유를 묻지 않는다.


지하주차장으로 통하는 건물의 현관문을 통해 하은이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민재는 저 몸에서 6 킬로그램은 살이 빠진 하은을 잠시 상상해보았다. 키가 168 정도 되는 하은은 체중 감량만 한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 적당히 드러내보일 만도 할 거 같았다. 하지만 체중감량만 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사십칠 년 동안 그녀를 형성해온 모든 정신적 문화적 세계는 체중감량이나 성형처럼 리폼이나 리모델링이 되는 게 아니었다.


민재는 하은과 밝은 낮에 둘이서만 함께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저녁에는 둘이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술을 한 적은 있지만, 다른 직원들 없이 둘이서 점심 식사하는 것도 처음이다. 그동안 하은과 단둘이서 주로 한 것은 섹스였다.


두 사람의 관계를 민재 병원의 직원들이 모두 알게 됐다는 건 신화병원에도 이미 소문이 퍼졌음을 의미한다. 민재의 머릿속에 문득 현경이 스치고 지나간다. 일 년 전 현경의 이혼이 법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던 날, 민재와 현경은 둘이서 술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날 밤 현경을 데리고 모텔을 들어갈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현경의 은밀한 인생 계획에 민재가 휘말리게 될 것이 두려워 이내 그 생각을 지워버렸었다.


민재의 차를 발견하고 하은이 민재의 옆 좌석에 올라탔다. 멀리서 민재의 차를 향해 걸어오는 하은을 바라보며, 민재는 혼자 속으로 물었다.


'저기 걸어오는 여자를 내 차에 태우고 남은 인생을 어디론가 달리고 싶은가?'


깊은 속마음에서는 '아니다'라는 대답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민재는 오늘만큼은 하은이 그의 차에 타도록 내버려 두고 있었다. 순간 민재는 자신의 거짓과 이기적인 욕망이 혐오스러웠다. 민재는 하은을 만나며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비난하고 책망하는 중이다.


"벨트 해."


하은은 단 한 번도 그녀를 향해 다정한 시선이나 따뜻한 음성으로 대해주지 않는 민재의 말에 언제나 고분고분 순종한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노예의 신분이었던 사람처럼, 하은은 그 누구 앞에서도 '노우'라는 말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런 하은이 편리한 기계처럼 느껴지다가도, 민재는 어느 순간 화가 나기도 한다. 어느 날엔가는 섹스할 때도 인간 여자처럼 잘 만들어진 인형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든 적도 있을 정도다.


고기를 좋아하는 하은을 데리고 민재가 외곽의 한우 식당으로 향했다. 먹방 유투버에 어울릴법한 하은의 푸짐한 입을 보며, 민재는 집에 계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다음엔 아버지를 모시고 하은과 셋이서 고기를 먹으러 와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민재는 병원 직원들이 오늘 하은에게 눈치를 주고 간호사 최유정은 하은을 향해 뾰족하게 날을 세웠을 것을 짐작했지만, 직원들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게 하은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경은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집안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무어라도 있으면 집어던지고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결국 분노한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옆 단지에 있는 민재의 아파트 쪽을 향해 무작정 산책을 나왔다. 그쪽 아파트 정문 안으로 한 대의 검은 차가 들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운전자 옆에 여자가 타고 있는 그 차는 민재의 차번호를 달고 있었다.


현경이 방향을 바꾸어 잰걸음으로 그녀의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어제 만들어두었던 반찬통 세 개를 냉장고에서 꺼내 종이가방에 담아 다시 현관문을 빠르게 나섰다. 민재의 아파트 공동현관을 통과하는 사람을 따라 들어간 현경이 민재의 아파트 문 앞에서 벨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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