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

by 도라지

마음에 기분 좋은 상상력과 의지력이 가득 고이는 대신에 좌절과 우울함만 그득하게 담긴 날, 아들놈들 점심으로 묵밥을 한 그릇씩 말아주고 나도 한 사발 크게 말아먹었다. 설거지도 안 하고 대충 그릇만 씻어 싱크대에 담가 두고, 시계를 보니 한 시 반이다.


배는 부르고 심란한 마음도 부르고, 에라 모르겠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보자 싶어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진동으로 해놓은 휴대폰이 문자가 왔는지 부들부들 떠는데도 들여다보지 않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들었던 것도 같다. 휴대폰이 이번엔 부르릉부르릉 계속 몸을 떨어댄다. 전화가 걸려왔나 보다. 남편이 급하게 사무실 일처리 요청할 게 있나 싶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철학책 같은 여자, 만화책 같은 남자 후기>에 이미 등장한 바 있는 00형이었다.


형이 청주에 왔다길래, 자다가 일어나서 대충 눈썹만 그리고 털점퍼를 입고 아파트 정문 앞으로 나갔다. 아파트 정문 앞에 나있는 도로의 작은 회전 교차로에서 쥐색 차 한 대가 천천히 둥근 원을 그리며 돌고 있었다. 사람이 걸어가는 모습만 봐도 그 사람을 알 수 있듯이, 그 차가 회전 구간을 두 바퀴째 돌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형의 차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내가 형의 옆 좌석에 올라타고는, 아파트 바로 근처에 있는 투썸플레이스를 그냥 지나치며 우회전으로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가라고 말했다. 부모산 아래에 있는 카페 불란서가 투썸보다 조금 더 한적하고 풍경도 좋은 까닭이었다.


형이 형의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잠시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다음엔 나의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러자 형이 취미생활로 이년 반 전에 시작한 그의 회화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수행할 분량을 목표점으로 정해놓고 그걸 내가 정해놓은 시간 안에 달성하려고 하지 말라는 충고 같았다. 글이든 예술이든 그걸 하는 사람은, 밥을 먹는 것처럼 매일 편안하게 그냥 조금씩 수행하는 일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특별히 성공에 대한 목표나 돈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있으면, 그것 역시 예술가의 자세가 아닌 것 같다고도 했다.


카페 불란서에 형과 마주 앉아, 빈 지게를 메고 앉아있는 형 앞에 형의 세컨드 하우스 옆집에 살고 있는 두 살 된 수컷 개 '감자'가 형을 바라보며 서있는 사진도 보고, '감자'의 독사진도 서너 장 보았다. 감자도 예쁘지만, 나는 형이 짊어진 지게가 그렇게 탐이 났다.


"형, 이 지게 만든 거 아니지? 철물점에서 샀어?"


나는 예전부터 지게가 하나 갖고 싶었다. 불 때는 걸 좋아하는 나는 아궁이가 있는 집을 일 없이 찾아가서 불을 때다 오곤 할 정도였다. 산에 갈 때마다 누군가 베어놓은 나무들이 숲의 한 구석에 쌓여있는 걸 보면 늘 지게 생각을 하곤 했다. 작년 겨울엔 물가 있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니며, 남편과 불장난을 여러 번 아니 자주 했었다.


평수도 적은 아파트에 지게 들여놓을 공간도 없고, 남의 눈치 안보며 불장난할 내 땅도 없고, 나무를 한 짐씩 짊어 오고 싶어도 지게도 없고, 오늘은 온통 없는 거 천지다. 말도 한 마리 갖고 싶은데, 그건 지게를 갖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지게도 있고 시골에 아궁이 있는 집도 있고 나무 땔감도 많이 해다 놓은 형에게, 도서관 앞에서 나를 내려달라고 했다. 정확히 몇 년 동안 소설책을 안 읽었는지 그건 말하지 않겠다. 도서관에서 소설책 세 권 빌려서, 나무가 그득한 지게를 등에 짊어진 기분으로 책을 손에 들고 집으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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