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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Dec 31. 2021

이혼 못하는 여자

2021년 12월 31일 오후 4시 40분, 남편의 휴대폰이 또 날랐다. 나를 향해 던져진 것은 아니지만, 저것은 나를 향한 폭력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걸 십 년 동안 참고 살았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 폭력에 굴복당하고 살았다. 그래서 저 폭력은 되풀이되고 있는 것인데, 나는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갈 데가 없다.


남편은 본인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를 모른다. 십몇 년 동안 남편 신용카드로 무언가 결제하려고 할 때마다 벌어지는 일이다. 자기가 그걸 알 이유가 없단다. 그래, 모르고 살 수도 있다. 하지만 한두 번 모르는 게 아니라 십수 년을 모른다고 하면서, 그걸 물어보는 마누라를 비난하는 건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그래서 나는 늘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부닥뜨린 문제를 해결하곤 했었다.


오늘 일찍 퇴근한 남편은 영화 관람이나 가자고 다. 나는 저렴한 요금제를 사용하고 있어서 통신사 멤버십 혜택이 적은 반면, 남편은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쓰기에 한 달에 한번 무료로 영화를 예매할 수 있다. 이제껏 노트북으로 통신사 홈피 접속해서 1인 무료 영화 예매를 했었는데, 그새 홈피가 좀 달라져서 '영화 예매하기'도 보이지 않고, 화면에 검색 기능마저 자꾸만 엉뚱하게 넘어갔다.


그래서 남편 휴대폰 어플로 들어가서 영화예매를 실행하다가 동행자 1인의 관람료를 결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남편의 신용카드로 결제하려다가 비밀번호를 몰라서 예매를 하지 못했다.


다시 노트북으로 통신사 홈피 들어가서 남편 이름으로 로그인, 한참을 애를 먹다가 통신사 상담원과 직접 통화를 했다. 상담사가 알려준 대로 홈피 화면까지 캡쳐해서 전송한 뒤 검색 기능칸 드디어 찾아내고 남편은 무료, 그리고 동반자 1인의 관람료를 내 카드로 막 예매하려참이었.


이 모든 과정들을 나 혼자 실행하는데, '당신 카드 비밀번호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내가 한 마디 했다고 기분이 언짢아진 남편이 핸드폰을 집어던진 것이다. 아니 휴대폰이 날기 전까지는 그 말조차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냥 비밀번호만 물어봤을 뿐이었다. 남편이 불러준 숫자가 네 번 다 오류 나서 다시 노트북으로 접속했던 것이다. 


휴대폰 액정이 깨지고, 남편은 자기 성질 못 이긴 채로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깬 남편의  저녁 밥상을 말없이 차려주고, 나는 방으로 들어와서 1인 가구 기초생활수급자의 자격을 알아본다. 나의 인생 스승 겸 친구에게 톡으로 하소연 좀 하고, 매번 실행하지 못하는 이혼을 다시 가슴속에 묻어 둔다.


철학을 공부하고 어디 가서 허울 좋게 철학 강사라고 허세 부리면 뭐하겠는가. 나는 이렇게 비굴하고 초라하게 산다. 폭력 앞에서 한 번 눈 감아준 대가는 평생 이렇게 계속되는 폭력을 불러오고 있다. 휴대폰 정도 아무 데나 집어던지는 것을 남편은 폭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빨이 몇 개 부러지고 시퍼렇게 멍이 들어야 폭력이란다. 남자는 다 그런 거라고 한다.


넬슨 만델라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을 감옥살이했다는데, 나도 올해로 결혼생활 27년째다. 스승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선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며, 궁핍을 능히 자유와 함께 저울에 올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어쩌면 자유와 궁핍의 무게는 동일한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직도 자유와 궁핍을 맞바꿀 준비가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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