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라지 Dec 31. 2021

사자 새끼, 토끼 새끼

니체가 그 유명한 명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선포한 건, 그때까지 서양 문명을 지탱하던 기독교 사상에 대한 선전포고이며 전복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들을 견고하게 받쳐줄 기둥과도 같은 정신을 갈망하게 되어 있음을 니체 역시 너무나 잘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니체는 신의 부재 뒤에 오는 세상의 '혼란'과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초인'을 이끌어낸다. 니체의 초인 사상이 등장하는 배경이다.


그리고 니체는 초인에 걸맞은 인간 유형을 생각해보게 된다. 그가 제시하는 초인은 두 가지 변용 단계를 거쳐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첫 번째 낙타의 단계를 넘어 두 번째 사자의 정신 단계를 극복하고 최종적으로 어린이의 모습을 한 자로 그리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두 번째 단계에 등장하는 사자는 '자율성'의 표상일 뿐이며,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태계의 최강자를 연상할 때 흔히 떠올리는 사자와는 다른 의미로 등장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는 점이다.


결국 니체가 궁극적으로 도달하고 싶은 '초인'의 모습은 생을 숙명적으로 마주한 자의 무한한 긍정이며 자율성이었다. 다가올 미래를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진무구하게 자기 앞에 놓여있는 놀이를 즐길 줄 아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니체는 '아모르파티'의 철학을 탄생시키게 된다.


니체의 '초인'은 슈퍼파워(super power)를 가지고 있는 능력자가 아니다. 인간의 주어진 운명에 무참하게 굴복당하지 않고, 인간을 한계상황으로 몰아넣는 외부환경에 자율적으로 당당하게 맞서 극복(overcome)하는 전사의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이 전사는 늘 인생이란 전쟁터에서 피 흘리며 전투만 하지 않는다. 인생을 즐기며 운명과 맞서 싸우며 받아들이긍정적인 면모를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니체가 주장하는 아모르파티다.


종합병원 응급실 간호사로 열한 달째 근무하고 있는 큰아들이, 세종시에 새로 개원한 충남대병원 공채 소식을 전하며 엄마의 의견을 묻는다. 세종시에 살아보고 싶은 욕망과 지금 직장보다 한결 수월한 업무 등의 장점에 잠시 그쪽 병원에 대한 긍정적 호감이 생긴 같았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응급실의 업무량은 청주 내 종합병원 응급실 중 가장 높기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큰아들은 병원에서 이년 근무한 뒤 간호사 특채로 뽑는 소방 공무원에 응시하고 싶다고 했었다. 인생을 제법 살은 내가 차분히 생각을 해보고, 굳이 거기로 갈 이유를 찾지 못한 까닭들을 풀어보았다. 아들이 금세 말귀를 알아듣고,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 준비를 한다.


선택의 기로에 서거나 어떤 상황에서 마음이 흔들릴 때, 지혜로운 주변인의 조언을 구하는 건 매우 합리적이고 유익한 방법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각자의 인생'이니까, 다 '타고난 몫'이 있으니까라고 말하며 주변인의 의견 개입을 반대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주변 사람과 여건을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는 속담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경구는 아니지만, 젊거나 늙거나 몸 상하고 위험한 고생은 구태여 돈 주고 사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젊어서 고생해 본 언니라서 찐으로 드릴 수 있는 말씀이다.


사자는 자연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새끼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는 시험을 한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자주 인용하기도 했었다. 사자의 본성이 다른 생명체를 공격하여 먹이를 획득해야만 생존이 가능한 생태 구조를 타고난 까닭이다. 하지만 토끼는 제 자식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기보다, 사냥꾼의 총에 맞지 않도록 빨리 뛰어 도망가거나 숨는 기술만 전수하면 된다.


고래 적부터 사람들은 사자처럼 생태계의 수장으로 우뚝 서서 천하를 호령하는 삶을 성공한 삶으로 묘사하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사자같이 강인한 자식에 대한 열망이 새겨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보니, 다 헛것이며 부질없는 욕망일뿐이었다. 사자처럼 살다가는 더 큰 병에 빨리 포획당하기 쉽고, 더 월등한 강자 앞에서 비굴하게 무릎 꿇어야하는 상황이 빈번해지기만 할뿐이다. 그렇다고 토끼처럼 풀이나 뜯어먹고 이산 저산 뛰어다니며 다른 생명체들과 즐겁게 어울리며 산다고 해서, 토끼의 생이 볼품 없거나 무의미한 도 아니다.


두 아들 의경 시절에도, 시위현장에 출동하는 아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었다.


"덩치 큰 애들이 맨 앞줄에 서면, 너는 적당히 가운데쯤에 서 있어."


생태계에서 개체수가 적은 사자 새끼로 살라고 강인하게 훈련시키는 부모들도 있다지만, 나는 토끼 같은 자식들이 평화로운 숲 속에서 즐겁게 뛰어다니는 삶을 더 꿈꾼다. 위버맨시(초인)가 뭐 별거더냐? 하루하루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놈이 진정한 위버맨시다. 


미스터 윤처럼 본인이 사자 무리의 수장이라고 생각하며 꼴 사납게 으스대는 자식보다, 영화 <주토피아>에 나오는 토끼 경찰관이나 토끼 옆에 있는 여우로 내 자식들이 한 세상 살아가기를 바래본다. 결국 여우 친구도 경찰관이 되지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어머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