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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Oct 19. 2021

어머니

요즘 국민의 힘 경선 tv토론을 재밌게 보다가, 예전에 조국사태 즈음 써두었던 글 하나를 꺼내보았다. 맨 아래 작성 날짜를 보니, 2020년 1월 3일 글이다.


새해 둘째 날, 오늘 나는 낯선 남자로부터 '어머님'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집 아이들 어려서 학원 다닐 적에 학원 선생님이 나를 가리켜 부르던 '어머님' 소리는 너무도 당연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훌쩍 자라서 성인이 된 지금, 아이들도 없는 어떤 자리에서 낯선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어머님'이라고 부르면,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그 사람이 남자가 됐든 여자가 됐든 상관없이 '어머니' 호칭 그 자체가 이상하게 탐탁지가 않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어머니라는 호칭을 들은 적이 자주 있었던 거 같다. 그런데 그때는 그런 호칭 따위에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나 스스로 젊은데, 남들이 나를 어떻게 부르든 아무 상관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마치 제 발 저린 도둑 신세가 되어버린 꼴이다. 누가 나더러 어머니라고 부르면, "내가 언제 너를 낳았느냐?"  한바탕 싸움이라도 붙을 기세로, 스스로 진짜 어르신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


요즘 장안의 화제는 더 이상 조국이 아니다. 시간여행자라고 불리는 게 전혀 손색이 없는 양준일은 묘하게 젊고 아련한 감성을 일깨운다. 한국 나이로 셈한다면 그는 88학번 우리 또래다. 브릿팝 로맨티시스트라고 불리는 모리세이도 52세에 저러진 못했다. 두 사람의 확연히 다른 음악세계는 물론이거니와 청춘 시절 모리세이의 기묘한 몸동작과 양준일의 춤사위는 전혀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세월을 뛰어넘어 현재 나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젊다. 한국 나이로 52세에 죽음을 맞이한 마이클 잭슨 역시 성형수술과 상관없이 언제나 젊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우리는 흔히 청춘이란 말과 젊다는 것을 동일어로 취급한다. 그러나 청춘은 특정한 시기에 국한되어 제한적이라면, 젊다는 것은 시간의 지배를 벗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분명 청춘은 아니다. 그러나 늙은 것도 아니다. 늙은 것이 아니라면 젊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십 년 전에도 어머니였던 나는 지금 굳이 다른 이름으로 불릴 필요도 없다. 몇 년 후 나는 진짜 '할머니'가 될 확률이 높고, 내 아들의 아기를 보고 싶은 바람  또한 벌써 내 안에 있다.


시간은 바라지 않아도 흐를 것이고, 나는 자연스럽게 세월을 더 많이 먹을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여전히 어머니로 불릴 것이고, 그리고 나로서 살아가겠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이 늦은 밤에 양준일 팬카페를 어슬렁거려본다.


(2020년 1월 3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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