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드 아이 9

by 도라지

소파에 앉아서 현경과 하은의 대화를 듣고 있던 상준이 불현듯 무슨 생각이라도 떠올랐다는 듯이 소파에서 일어나서 주방 쪽을 향해 움직이며 말했다.


"현경 선생님이 만들어온 반찬 좀 봐도 될까요?"


반찬통들을 꺼내 냉장고에 집어넣으려던 하은이 얼른 반찬통의 뚜껑을 열어 식탁 위에 펼쳐놓는다. 파김치, 고들빼기, 꽈리고추 멸치볶음이 담겨있는 반찬통을 확인하며, 상준이 오랜만에 입맛이 도는지 어린애처럼 신나는 표정을 지으며 현경에게 부탁했다.


"현경 선생님, 혹시 수제비 떠서 끓일 줄 아세요?"


상준의 부탁에 현경은 능숙하게 밀가루 반죽을 해서 수제비를 끓이기 시작했다. 민재도 저녁 모임이 있긴 했지만,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수제비 기억이 떠올라서 한 그릇 먹고 나가기로 했다.


현경의 수제비는 일품이었다. 계란이나 삶고 샌드위치나 만들 줄 아는 하은의 손맛과는 비교가 안 되는 솜씨였다. 덩치 큰 하은을 제외하고서 남들이 이 집안의 풍경을 본다면, 시아버지와 남편의 조금 이른 저녁 식탁을 준비하는 며느리가 수제비를 정성스럽게 끓이고 있는 일상적인 모습일 것 같았다.


비록 남의 집 주방이지만 일단 필요한 재료들을 식탁 위로 끄집어낸 뒤 재빠르게 처리하는 현경의 모습은 수술실에서 만큼이나 철저하고 능란했다. 옆에서 두서없이 서있는 하은의 모습이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것처럼 비쳤다.


묘한 조합이었지만, 네 명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수제비를 맛있게 먹었다. 상준도 민재도 맛있게 먹었지만, 하은이 더 맛있게 먹는 것도 같았다. 민재가 가볍게 수제비를 한 그릇 먹고 집을 나설 때 현경도 따라서 민재 집을 나왔다.


"오늘 너무 고마웠어요, 김 선생~ 아버지가 저렇게 맛있게 식사하시는 모습 어머니 돌아가시고 처음인 거 같아요. 다음에 내가 이 빚은 꼭 갚을게요."


"별말씀을요~ 아버님 드시고 싶은 거 있을 때, 언제든 연락 주세요. 제가 음식은 웬만큼 할 줄 알거든요."


민재의 진심 어린 말에, 현경은 오늘 오전부터 용솟음치던 알 수 없는 배신감과 불안감 등을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현경의 일보 전진 공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현경은 집으로 돌아와 침착하게 전략을 세워본다. 오늘 낮에 충동적으로 반찬통을 싸들고 무작정 민재 집으로 돌진했던 건, 민재 아버지 상준의 상태가 양호했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하지만 상준은 언제 어느 때 치매 증상이 나타나서 하은을 찾게 될지 모를 일이다. 상준은 그런 의미에서 신뢰할만한 패가 될 수 없다.


이건 하은과의 싸움일까, 아니면 민재와의 싸움일까 그것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 이것은 하은과의 싸움이 아니라 민재와의 전투가 분명하다. 안목이 까다로운 현경은 다시 그녀의 인생에 민재와 같은 목표점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사랑이라고 하는 건 결국 생존을 향한 처절한 전투에 불과할 뿐이었다.


대학생이 된 현경의 두 딸들은 아빠의 계산적이지만 매우 스마트한 두뇌와 현경의 치밀하고 인내심 있는 기질이 적절하게 혼합되어 우수한 양태로 성장했다. 외모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뛰어난 재능들을 가지고 있어서, 현경은 딸들에게 거의 신경 쓸 게 없을 정도다. 현경도 그런 면에선 미혼의 하은만큼 자유로운 사람이며, 어느 것에도 구속됨이 없는 상태였다.


민재에게 영재 고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고 현경에겐 미모 역시 뛰어난 대학생 두 딸이 있다. 잘만 하면 함께 어울리기도 쉬울 것이다.


하은이 민재의 아침을 챙겼다면, 이제부터 현경은 민재 아버지의 입맛을 사로잡을만한 반찬과 음식을 만들면 된다. 하은이 민재와 삼 개월 된 섹스파트너 관계라는 거, 그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일단 현경도 민재와 섹스부터 해야 한다. 민재와 하은의 관계가 계속되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민재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


현경이 오늘 오후 유심히 보았던 하은의 몸을 더듬어 생각해본다. 뽀얗고 하얀 매끄러운 피부 하나가 유일한 장점이었다. 하지만 페니스를 삽입하는 남자만이 알 수 있는 여자의 몸맛이라는 게 있다는데, 하은의 몸맛이 어떤 건지 그리고 현경의 몸맛은 또 어떠할지 거기에서 현경은 막막해지는 기분이었다.


남자의 성기가 각기 다른 것처럼 수술실에서 보았던 여자들의 회음부와 질은 모양과 크기, 색깔들이 다 달랐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 속은 또 사정이 다를 것이다. 갱년기를 지나 노화가 진행되면서 질 건조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들도 많이 보았다. 현경은 주방으로 가서 이것저것 각종 영양제를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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