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수요일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수술실에선 빗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을 수 없다. 사방이 벽으로 막힌 수술실 내부의 간호사 휴게실에서 조은진 팀장이 겨우 틈을 내서 커피를 마시며 현경에게 물었다.
"김선생, 하은이는 도대체 어디가 매력 있는 거야? 오드아이가 그런 여자랑 잘 줄이야.. 신의 계획에도 없던 일 아닐까?"
옆에서 함께 진한 블랙커피를 마시고 있던 유민지가 탁자 위에 내려놓았던 안경을 집어 들며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팀장님, 하은이란 여자가 못생겼어요?"
안경 너머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번득이는 유민지 역시 서른여섯이지만 아직 미혼이다.
"못생겼다기보다는, 결코 예쁘지 않은 외모거든. 게다가 뚱뚱하기까지 해요. 도저히 이해불가란 말이지. 우리 병원에서 스캔들 났던 거 잘 생각해봐. 하나같이 몸매 좋고 어리고 예쁜 애들이었잖아. 그런 애들에 비한다면 하은은 볼품없는 뚱뚱한 아줌마 나이잖니? 마흔일곱 먹은 고졸 조무사 뚱땡이랑 오드아이가 바람을 피운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정말 대성통곡할 일이지."
은진이 커피를 들이켜는 모습은 상충되게도 마치 게거품이 분출되는 모습처럼 혼탁한 분위기였다. 은진이 내 남편의 일이라도 되는 냥 분개하는 걸 듣고 있던 현경이 한 마디 거드는 척한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래도 오쌤이 바람피우는 건 아니죠. 엄연히 싱글인데요. 누구랑 잔들 그분 자유 아니겠어요?"
이렇게 말하는 현경의 속마음에서는, 곧 그녀도 간호사들 입방아에 무참하게 찧어질 수도 있겠구나, 차라리 그렇게 구설수에 오르는 여자가 되어보리라 또 은밀하게 다짐을 한다.
오후 다섯 시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현경에게 톡이 왔다. 수술실은 다른 부서처럼 3교대가 없다는 장점 때문에, 가정이 있는 여자 간호사에게 오히려 유리한 부서라고도 할 수 있다.
<저녁에 뭐해요?>
분명히 오민재로부터 온 톡이 맞는데, "김선생"이라고 부르는 호칭도 없고 문장도 이전과 달라진 느낌이었다. 다른 여자에게 보내는 문자가 잘못 보내져 온 건가 현경은 잠시 머뭇거리며 톡에 적힌 글자들을 몇 번을 들여다보고 생각을 해본다.
보내진 이 톡만 보면, 썸을 타는 남녀의 흔한 톡 대화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거 같았다. 민재가 다른 여자에게 보낼 톡을 현경에게 잘못 보내는 따위의 실수를 할 남자가 아니다. 현경은 마치 연인에게 답장을 보내듯이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계획도 약속도 없는 걸요.>
<그럼 같이 저녁 할래요?>
민재는 지난 토요일 수제비에 대한 답례를 하려는 지도 모른다. 상관없다. 설령 "수제비에 대한 빚갚음"이라고 또렷하게 명시해서 선긋기를 시도하려 한다 해도, 무조건 민재와 둘이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만 한다. 결벽증까지는 아니어도 깔끔 떠는 걸 좋아하는 민재가 스스로 식당을 정하도록 하는 편이 낫다.
<좋아요~ 저는 입맛이 토속적이라 비싼 음식점이나 고깃집 말고 어디든 다 좋아요~>
현경은 민재가 수려한 외모와 달리 토속적인 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의 음식을 많이 먹고 자란 사람들은 대부분 그랬다. 민재와 약속 장소를 정하고, 현경은 다섯 시 삼십 분에 퇴근을 했다. 장소는 현경과 민재의 집 근처 식당이다. 현경이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며 몸매 점검을 한다. 이혼한 지 일 년 된 마흔여덟 여자의 몸치고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남편과의 애정 없는 섹스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지난 일요일에 백화점 이너웨어 전문점에서 새로 사두었던 속옷을 입고, 단추를 채우는 아이보리색 블라우스 셔츠에 단정한 플레어스커트를 입었다. 액세서리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민재는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에 현혹될 남자가 아니다. 그가 성욕을 풀기 위해 하은과 모텔을 들어간다면, 현경은 그의 성적 환타지를 이끌어내 볼 생각이다. 먼저 두뇌에서 상상으로 구현되는 호기심을 자극해볼 계획이지만, 남자의 욕망이 발현되는 지점을 현경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현경은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전승시킨 '최초의 여자' 판도라가 되는 기분이다. 신들이 각자의 힘을 기울여 탄생시킨 아름다운 재앙, 남자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매력 덩어리, 남자들에게는 최대의 재앙이 되는 여자의 계보는 판도라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