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가 먼저 식당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경이 토속적인 음식을 거론하기도 했지만, 아파트 근처에 있는 복어집은 민재가 평소에도 즐겨 찾는 집이기도 하다. 비 오는 날에 복지리와 소주는 제법 궁합이 맞는 것도 같다. 궁합이 맞는다~ 민재가 그의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의 끄트머리에서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 내리는 빗방울에선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민재는 여자를 기다리며 식당에 앉아있는 걸 오랜만에 해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각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요즘 아이들은 모를 수밖에 없는, 옛날 커피숍의 분위기가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이십 년 전에는 이혼한 와이프를 기다리며 카페에 앉아, 흘러나오는 음악을 무심히 듣는 시간이 무척 행복했었다. 여자랑 잠을 자기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이올린의 현처럼 동일한 하나의 줄 위에서 그녀와 시간을 공유하며, 주고받는 눈빛 속에서 함께 세상을 읽어가고 기억을 구성하는 것이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저만치 창밖으로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오는 현경의 모습이 보였다. 민재는 우산 속에 들어있는 여자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실루엣과 걸음걸이만으로도 현경을 알아보았다. 현경이 자리에 앉자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이 집에서 나오는 기본 반찬 가운데 취나물 무침과 샐러드는 언제 먹어도 기분을 좋게 만들어준다.
민재는 취나물무침과 샐러드의 맛이 동시에 나는 여자를 아직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과연 그런 여자가 있을까? 현경이 산뜻한 옷차림으로 세련되게 앉아있는 테이블에 세팅된 밑반찬을 바라보며, 민재는 결국 '여자'에 관해 생각하고 있다. 남자에게 궁극적인 것은 결국 여자인 것일까 문득 인류사적인 문제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소주잔을 서로 기울이며 허물없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서는데 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온종일 비가 내리는구나' 민재는 요즘 자꾸만 혼자만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이어가는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하은과 어느 날 우연히 섹스를 나눈 뒤부터 생기기 시작한 습관인 거 같다.
"원장님, 잘 먹었습니다~"
식당 앞에서 현경이 예의를 차리는 직원처럼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순간적으로 현경의 몸이 비틀거렸다. 민재가 재빨리 현경의 팔을 잡아 부축해주다가 현경의 눈과 마주쳤다. 민재는 자신도 모르게 현경을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김선생도 걸어온 거 같은데 우산을 한 개만 쓰는 게 어떨까요. 내 우산 속으로 들어올래요?"
민재는 잠자리를 같이 하고 있는 하은에게는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말투로 현경의 의사를 물었다. 휘청거리면서도 그녀의 우산을 손에 들고 있던 현경이, 그녀의 삼단 우산을 말끔하게 접어서 핸드백 속에 집어넣었다.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어야 민재와 우산을 나누어 쓰기가 편할 거 같았다.
현경이 민재가 우산을 들고 있는 접힌 오른팔 옆으로 몸을 밀착하며 검은색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여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민재의 몸은 여러 갈래의 생각들 속에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현경이 민재의 복잡한 마음을 단번에 정리라도 하려는 듯이, 술에 취해 목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언가요?"
"여자와 돈 아닐까요? 그럼 여자에게 가장 중요한 건 뭔데요?"
민재가 왼손으로 우산을 바꿔 들면서 오른 팔로 현경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되물었다.
"남자와 사랑요."
현경은 어머니들의 그 흔한 구전 레퍼토리처럼 "자식"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는다. 늙어서 자식에 의해 부양받으며 생존해야 했던 농경 시대의 여자는, 이미 관객들마저 외면해버린 지 오래되어 흉측한 몰골로 몇 년을 버티다가 결국 부서져버린 옛날 극장에 대한 향수와도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수술실 팀장 조은진은 어느 날 아침에 남편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자 그가 죽은 걸 알게 되었다. 장례식장에서 한 번쯤은 눈물을 흘렸겠지만, 조문객들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능숙한 수술실 팀장의 모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경은 민재의 오른팔에 감긴 그녀의 어깨를 의식하며, 방금 전 그녀가 내뱉은 '남자와 사랑'이라는 말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왜 불쑥 그런 대답이 튀어나왔는지 현경 자신도 아리송할 뿐이다. 아무 사이도 아닌 민재가 죽는다면 현경 자신은 슬플까, 전 남편의 죽음과 민재의 죽음 중에 무엇이 더 슬플까.. 현경은 민재의 팔에서 온기를 느끼며, 아직 한 번도 잠자리해본 적도 없는 민재의 죽음이 더 슬플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