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종일 비가 내리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민재는 청춘 시절에나 느껴보았고 언제부턴가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그의 심장 속에서 옅으게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고등학생이었던 민재가 어느 가을의 월요일 아침 학교에 등교했을 때, 민재의 첫사랑이었던 여선생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민재는 '이제 그녀는 돌아오지 않아'라고 혼잣말을 하며 '나를 떠나 멀리 간 사람'에 대한 생각의 매듭을 지었던 기억이 쓸쓸하게 떠올랐다. 죽음의 세계로 들어간 자만이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사람 역시 다시는 내게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하나의 빛조차도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혀있는 우주, 민재는 그 '순간' 모호한 고통 속에서, 여선생을 사랑했던 방금 전까지의 민재를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야만 그가 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의 사랑과 영원한 결별은 하나의 우주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우주를 탄생시켜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창조 과정이었다. 그 새로운 창조의 고통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강렬한 흔적을 하나의 우주에 남기기에, 살아가면서 다시 그 '순간'을 소환하는 짓은 하지 않게 된다.
그녀는 윤리 선생이었다. 철학을 전공하고 윤리교과로 임용된 케이스였다. 그때 상처 입은 마음에 단단하게 못질까지 해서 가두어두었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문이, 오늘 빗방울이 떨어지는 우산 속에서 한 여자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걸어가는데 삼십 년 만에 처음으로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있었다.
하은과 만나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밥이나 술을 먹고 섹스를 나누는 것 외에 다른 게 없었다. 누군가의 눈빛을 지그시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다가 때로는 상대방의 눈 속에 어린 상념을 마주 앉은 자리에서 저절로 읽게 되거나, 혹은 어떠한 사건에 대하여 깊이 놀라는 상대의 표정을 보며 그 사건 속으로 동시에 빨려 들어가는 신비한 경험을 하은과는 한 번도 나눌 수가 없었다. 사람이 눈빛으로 상대방을 사로잡는 기술은 영혼이 강인하면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자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때 민재의 첫사랑이었던 윤리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하은에게 정신이란 육체의 거추장스러운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경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민재와의 잠자리를 탐하거나 민재의 안방을 노릴 수도 있는 여자라는 걸 알지만, 현경의 그런 속물적인 계산마저도 오늘 내리는 빗속에서는 부단한 정신의 활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되어 소멸한 줄로만 알았던 첫사랑에 대한 기억의 문이 열리는 순간에, 현경이 바로 민재의 오른팔 안에 감겨있다. 기억의 문이 빗장을 여는 순간은 사람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민재는 깨닫는다. 민재가 현경의 어깨를 더 힘 있게 감싸 안으며 그녀의 왼쪽 귓가를 향해 더운 입김을 내뿜으며 말했다.
"당신만 괜찮다면 나는 당신과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당신은요?"
현경이 민재의 옆에서 얌전히 걸으며 그녀의 몸 앞으로 두었던 왼쪽 팔을 빼서 뒤로 돌려 민재의 등허리를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재와 현경이 식사를 마친 골목을 조금 돌아 나가면 모텔이 몇 군데 보인다. 민재는 하은과 들어갔던 곳을 제외하고 깔끔해 보이는 건물을 찾아본다. '저기가 좋겠군'하며 목적지를 정하고 모텔이 보이는 골목으로 막 들어서려는 때였다. 민재의 휴대폰이 빗소리와 구두 소리의 틈 사이로 존재를 드러내며 시끄럽게 울려댔다. 순간적으로 민재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현경이 바라보며 상황을 예감한다.
"네, 여사님. 알겠습니다. 금방 갈게요."
민재의 아버지 오상준의 간병인 아주머니에게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비 내리는 저녁에 새로운 우주의 시작을 탄생시켜보려 했던 민재의 뜻밖의 열망은 빗물이 쓸려 내려가는 하수구로 삽시간에 빗물과 함께 흘러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