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은 지난밤 민재와 헤어져 집에 돌아와서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민재 아버지의 치매 증상이 심해질 때마다 현경은 한없이 무력해지고, 상대적으로 하은은 힘들이지 않고도 위로 상승하는 꼴이었다. 함박눈이 내릴 땐 온 세상이 마법처럼 아름다웠는데, 해가 나면서 길 위에 쌓인 눈들이 녹으며 질퍽거리는 흙길을 따라 현경은 끝도 없이 걸어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막연히 무엇인가 생기기를 기다리는 건 괴로운 일이다. 현경은 상황에 밀리어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거나, 백기를 들고 나의 패배를 알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상황은 바꾸면 되는 것이고 변수 역시 만들면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만큼 나쁜 것은 없다. 현경은 나무의 밑동이라도 발로 차 볼 생각이다.
수술실에는 따로 팀장실은 없고, 환자들 차트를 열어보고 오더를 확인하는 용도로 설치되어 있는 PC가 몇 대 놓여 있는 탁자가 벽에 달라붙어있는 수술방이 수술이 없는 시간에 팀장실로 사용되고 있다. 두 개의 수술방과 한 개의 환자 대기실을 마주하고 있는 휴게실이 탈의실 겸하여 남녀 구분하여 각 방으로 꾸며져 있는데, 여자 휴게실이 조금 더 넓게 빠졌다. 거울을 보며 보톡스 시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조은진을 향해 현경이 무심스러운 척 입을 열었다.
"팀장님, 지난번 시술하신 뒤로 몰라보게 젊어지셨어요~"
"그렇게 보여? 김 선생은 아직 팽팽해서 모르겠지만, 조만간 내 심정 이해할 날이 올 거야."
"그런데요, 팀장님, 오민재쌤 아버지 치매가 점점 심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그 하은이란 조무사가 시아버지 모시듯 정성스럽게 돌본다는 소문이 돌던데요."
"그러게 말이야, 오드아이 병원에 최유정이도 단톡방에 그렇게 말했었지. 우리 지난번에 오드아이랑 같이 술 먹고 노래방 갔던 날도, 오드아이가 아버지 걱정을 했던 거 기억나지? 오드아이 옆에서 하은이를 떼어내려면,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입원시키든가 해야 하는데.. 오드아이가 아직 저렇게 고집을 부리고 집에서 모시고 있으니, 이 사달이 난 거 아니겠어? 가만, 내가 이렇게 넋 놓고 있을게 아니네. 시설 좋고 전문적인 병원을 적극적으로 소개해야겠는 걸~"
수술에서는 현경의 민첩하고 정확한 판단력에 의존하던 조은진이 이런 일에선 현경의 의견 같은 건 묻지도 않고 팀장의 업무 능력을 마음껏 과시해본다. 현경은 은진의 추진력이 성공적으로 결과를 맺기를 이번처럼 간절하게 한마음으로 기원해본 적이 없었다.
운동 신경이 없는 조은진이 골프를 시작한 것도 오드아이 민재 때문이었다. 사별한 전 남편은 골프광이었다. 은진의 남편이 일주일에 두 번씩은 필드에 나가서 젊은 여자들이랑 어울려 다닐 때 은진에게도 골프를 배울 것을 권유했지만, 돈 많은 은진은 이상하게도 골프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 오민재가 골프를 치기 시작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뒤, 바로 연습장에 등록하고 이 악물고 연습을 시작했다.
정기적으로 성형외과에 다니며 관리받는 것도 어떤 날엔 귀찮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민재를 향한 연심 하나로 그 모든 귀찮음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은진은 어젯밤 현경과 민재 사이에 흘렀던 뜨거운 기류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하은을 민재 옆에서 떼어낼 궁리만 머릿속에 가득하다.
민재에게 소개하기에도 부끄럽지 않은 적당한 요양병원을 물색해 놓은 뒤, 은진이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원장님 오늘 저녁 약속 없으시면, 식사하시고 스크린 어떠세요? 김현경 선생도 골프 연습 시작했다는데, 함께 데리고 나가도 괜찮겠지요?"
휴대폰 건너편의 민재가 승낙을 한 모양이다. 은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현경이 바라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