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오드 아이 15

by 도라지

현경을 몽환적인 성적 흥분 상태로부터 끄집어낸 것은 택시기사의 건조하고 뜬금없는 멘트 때문이었다.


"사장님과 사모님 두 분 다 여기 고향이 아니시지요? 부부가 이렇게 두 분처럼 멋있는 분들은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이 아니더라고요.. 택시 일을 하면서 손님들을 모시다 보니, 자연스레 눈썰미가 생겨서요."


민재와 현경은 두 사람 다 이 지역 출신이며 부부 사이도 아니었지만, 민재도 현경도 딱히 부정의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이유로 택시기사에게 "00 아파트로 가주세요"라고 하면, 흔히 택시기사는 두 사람을 부부로 오해하기도 했다. 민재가 깍지를 끼고 있던 현경의 손에 슬며시 힘을 주며, 그래도 택시 기사에게 예의를 차려 밋밋하게 대꾸했다.


"우리 부부를 멋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재의 농담 섞인 대꾸를 들으며 놀란 것은 현경이었다. 비록 농담이긴 하지만, 분명 민재의 입에서 "우리 부부"라는 말이 튀어나왔다는 사실은 현경에겐 매우 긍정적인 신호임과 동시에 민재와 부쩍 친밀해진 느낌을 갖게 했다. 택시 뒷좌석에 흐르는 공기의 밀도가 또 한 번 달라지는 것 같았다.


아파트 정문 앞에서 내린 두 사람은 다시 격식 있는 직장인들이 되어서 형식적인 인사를 나누고 각자 집으로 들어갔다. 어제는 뜨지 않았던 달이 검은 하늘에서 둥글게 배를 부풀리고 있었다. 다음 주면 보름달이 될 게 분명했다.


이틀 뒤 토요일 오후에, 조은진은 김현경과 오민재를 대동하고 외곽에 있는 정현 요양병원을 방문했다. 정세현 전 팀장의 요양병원은 며칠 뒤 개원을 앞두고 있지만, 민재의 사정을 아는 정세현이 미리 시설을 둘러보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정세현은 그녀의 어머니도 여기로 모셔올 생각이기 때문에, 건물의 내부 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추어놓고도 건물의 환기 등을 고려하여 개원을 서두르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자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려는 것 같은 정세현의 경영 마인드가 일단 민재의 뇌리 속에 긍정적인 호감을 불어넣는다.


정세현 팀장의 오빠 정주현은 민재의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다. 동문회에서 간간이 만나 본 정주현의 이미지도 썩 괜찮은 편이라서, 민재는 다음 주 개원과 더불어 아버지를 정현 요양병원으로 모시기로 결정을 했다.


두 달 전부터 민재 아버지 오상준은 요양병원으로 보내달라고 민재에게 말을 했었다. 아버지로서 아들 민재가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게 안쓰럽기도 하거니와, 그가 치매 증세가 심해질 때마다 하은을 그의 첫사랑으로 착각하는 통에 하은이 집까지 드나드는 게 심히 불안하고 못마땅했었다. 민재가 첫 번째 결혼도 실패했는데, 행여라도 하은이 민재의 두 번째 짝이 되느니 차라리 민재가 혼자 지내는 편이 낫다고 상준은 생각하고 있다.


민재 옆에서 하은을 떼어내려면, 상준 스스로 민재 옆에서 떠나 주는 게 옳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상준은 자신의 그런 마음을 민재에게도 분명히 밝혀야겠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하지만 상준이 요양병원에 들어간 이후에나 민재에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현경이 비록 이혼녀이긴 하지만, 하은보다야 백배 믿음이 가고 상준의 마음에도 흡족하게 여겨지는 여자다. 상준은 언제고 기회가 되면 아들 민재에게 현경의 이야기도 넌지시 꺼내볼 참이었다.


정현 요양병원을 둘러보고, 현경이 민재의 집으로 함께 가서 상준을 위해 소탈한 저녁상을 장만했다. 현경이 상준을 위해 밥상을 차리고 싶다는 말을 꺼낼 때, 민재는 그것이 호의든 연민이든 현경의 마음이 고마웠다. 간고등어 시래기조림과 된장찌개를 끓여서 식탁 위에 차려놓은 밥을 상준이 맛깔스럽게 먹고 난 뒤, 상을 물린 시아버지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경 선생님은 따님만 둘이라 했지요? 두 명 다 대학생이라 했나요?"


"네, 교수님~ 애들이 둘 다 아주 야무져서, 제가 크게 걱정을 안 해요."


"우리 민재는 아들만 하난데, 따님들이 우리 손주보다 누나들이라서 많이 귀여워해 줄 거 같네요."


"진우 사진으로 봤는데도 아주 듬직하고 바르게 컸던걸요. 아드님도 손주님도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잘 나고 멋있으신지~, 그게 다 교수님 닮아서 그런 거 같아요."


"현경 선생님, 우리 민재 좀 잘 부탁드립니다. 저 때문에 민재 혼자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어요. 가여운 놈입니다. 제가 현경 선생님이니까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예요."


상준의 느닷없는 요청에 민재도 현경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지만, 현경은 상준이 요양병원 가기를 바랐던 마음 때문에 공연히 죄짓는 기분마저 들었다. 자꾸만 "현경 선생님"이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써주는 상준에게 말씀도 호칭도 편하게 하시라 몇 번을 당부했지만, 오상준은 치매 증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면 현경을 깍듯이 예우해주었다.


상준이 치매 증세가 심해질 때마다 하은만 찾지 않는다면, 현경은 상준이 죽는 날까지 병수발을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전남편의 시어머니와 현경의 친정어머니 두 사람의 말년 병시중을 들며, 현경은 체력뿐만 아니라 정신력도 월등해졌다. 하물며 사랑하는 민재의 아버지인데, 현경은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현경은 지금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민재에게는 엄연히 섹스 파트너인 하은이 있고, 현경과 민재는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닌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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