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민재는 자신의 아파트 동으로 들어가는 현경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현경으로부터 전해오는 이 평화로움은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해보게 된다. 이혼한 와이프 진아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했던 이 평화로움이 문득 생경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어떠한 불만족과 두려움도 없는 상태이며 미세한 불안이나 갈등마저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평화였다.
아마도 이것은 현경이 인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당당하고 진취적인 태도로부터 전해져 오는 신뢰에 바탕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민재는 현경과 있으면 인생의 온갖 문제들이 골치 아픈 함수에서 초등 산수 문제로 전락하는 느낌을 받았다. 현경은 신화병원 수술실에서도 그랬다. 모든 상황을 민첩하게 파악하고 그만큼 대응도 빠를 뿐만 아니라 침착하고 정확했다. 그래서 모든 과의 의사들은 현경을 데리고 수술실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검은 구름에 가렸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달을 올려다보며, 민재는 여자가 아닌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의 불안을 해소시켜주고 그의 외로움을 동시에 덜어내주는 존재가 지금 민재 옆에는 아무도 없다. 몇 해 전만 해도 아버지가 그런 존재였는데, 이젠 민재가 의지했던 아버지마저 치매에 빼앗겨버린 셈이다. 어머니의 죽음과 아버지의 치매는 순차적이긴 했지만 거의 동시에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녀독남이었던 민재가 혼란스럽고 힘들 때 와이프마저 민재를 버리고 떠나간 뒤, 민재는 일 년 전부터 삶의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처럼 헤매고 살았다. 그나마 아버지를 지켜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이 그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민재의 상실감과 불안은 날이 갈수록 더욱 그를 옥죄어왔다. 어느 날엔가는 희미하게 남아있던 단 하나의 삶의 의미마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삼켜지고, 온 세상이 회칠 한 무덤 속처럼 캄캄하게 느껴졌다. 차라리 이게 끝이라면 더 이상 한 줄기 빛과 같은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맬 필요도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었다. 민재는 세상과의 결별을 강요당한 사람처럼 절망적으로 불안하고 외로웠다. 그의 내면에서 넘실거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는 어둠은, 언제라도 틈만 보이면 즉시 민재를 통째로 집어삼킬 준비가 되어있었다.
불안과 외로움은 수순처럼 불면증으로 전개되고, 끝도 없는 시간의 감옥 속에 갇혀 숱한 불면의 밤을 지새우고 나면 세상은 다시 그를 향해 환자들을 수도 없이 뱉어냈다. 서울에는 고등학생 아들이 전 와이프와 살고 있고, 여기에는 치매 걸린 아버지가 계셨다. 민재가 퀭한 눈으로 새벽을 맞으며 물미역처럼 축 쳐진 몸을 이끌고 출근을 하면, 하은이 그런 민재를 측은하게 여기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민재가 하은과 섹스를 나눈 것은 오로지 성욕 때문만은 아니었다. 현실 속에는 늘 한 개의 현실만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에 의해 춥고 어두운 동굴 속으로 무력하게 끌려들어 가고 있는 것 같았던 민재는, 동굴을 탈출해서 환한 빛이 있는 바깥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살고 싶다는 외침이 민재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간절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때 불안과 외로움의 동굴에 갇힌 민재를 구원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이 있었다 할지라도, 민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섹스 밖에 없었다. 그래서 민재는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여자 하은과 섹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동굴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은과의 섹스는 탈출의 방법은 되었지만, 동굴을 탈출한 민재에게 더 이상 다른 의미는 주지 못했다. 동굴 밖의 삶에 하은을 데려다 놓기에는 하은은 너무 공허했다. 그런데도 민재는 탈출 수단에 불과했던 무의미한 섹스를 두 달째 지속하는 중이다. 이제 민재는 하은과의 섹스를 멈출 이유를 분명히 깨닫는다.
집으로 돌아온 민재가 아버지 오상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왜 두 달 전부터 요양병원에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어요? 혹시 저에 대한 걱정 말고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닐까 해서 여쭙는 거예요. 가령 간병인이나 도우미 아주머니가 맘에 안 드신다든지, 아니면 하은이 집에 드나드는 게 못마땅하셨다든지 그런 거요."
그러자 상준이 아들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다정하게 대답을 했다.
"그래, 솔직하게 대답하마. 내가 치매 증세가 심해질 때마다 하은이란 사람을 내 첫사랑으로 착각한다는데, 내가 그걸 용납을 못하겠더구나. 더구나 네가 그 여자랑 행여라도 친하게 되는 건 더더욱 싫다. 아버지는 현경 선생이 니 짝이 됐으면 하고 바라고 있어."
민재는 아까 현경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그대로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걸 들으며 다시 현경을 떠올렸다. 치매가 이토록 무서운 병이라는 데 새삼 놀라기도 하면서 갑자기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팔십 년 동안 구성했던 사람의 인식 체계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치매의 위력 앞에서, 아버지는 너무 무력한 존재일 뿐이었다. 민재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마저 빼앗겨버리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초라하고 가엽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