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준은 그의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는 것이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현경에게 민재를 부탁했다. 다음 주면 요양병원에 들어갈 거라는 것을 벌써 알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아들이 혼자 남겨지는 것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날것으로 드러내 보였다.
현경을 바래다주겠다며 아파트 입구까지 따라 나온 민재가, 아파트 옆으로 바로 나있는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매우 어려운 부탁이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현경씨, 제가 내일 친구들과 골프 약속이 있는데요, 간병인 아주머니께서는 오전에만 시간이 가능하다고 하고, 저는 오후 다섯 시에나 집에 돌아올 수 있어서요. 혹시 오후에.."
민재가 "현경씨~"라고 부르는 호칭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던 현경이, 민재의 불편하게 웅얼거리는 듯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말을 가로챘다.
"제가 오후에 아버님과 함께 있어도 될까요? 교수님 무척 재밌는 분이세요.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걸 잊게 돼요.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교수님이셨을 거 같아요."
다음 날 일요일 오후 상준을 돌볼 사람이 없어서 민재는 하는 수 없이 하은에게 아버지를 부탁했었다. 하지만 오늘 상준이 현경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민재는 마음이 바뀌었다. 아버지는 하은이 아니라 현경을 탐탁하게 여기고 계셨던 것이다. 치매 증세가 있을 때마다 하은을 첫사랑으로 착각하는 아버지는 단지 열일곱 어린 남자애에 불과했지만, 평소에는 단정한 현경을 바라보며 미더워했다는 것을 민재는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아까 민재의 집에서 민재를 잘 부탁한다는 상준의 오더에 힘을 받은 현경이, 주저하지 않고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원장님, 아버님이 치매 증세가 없을 때는 하은씨를 별로 반기지 않으시는 거 같아 보여요. 아버님께서 먼저 요양병원 보내달라고 말씀하신 데는, 원장님에게 미안한 마음 말고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혹시 아버님이 치매 증상이 나타날 때마다 하은씨를 첫사랑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평소의 아버님께서는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신지 두 분이 이야기 나눠보시는 건 어떨까요? 교수님이 아무에게나 함부로 원장님을 부탁한다는 말씀을 하실 분이 아니잖아요."
아파트 옆으로 나있는 산책길의 막다른 지점에 이르렀을 때는 가로등의 전구마저 나가버려서 사방이 온통 컴컴했다. 현경의 지적은 예리하게 적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준은 정신이 쾌청할 때 하은이 눈앞에 띄기라도 하면 말수가 유달리 없어지고 눈빛에는 알 수 없는 불만이 가득했다. 상준이 갖고 있던 그 불편함 같은 것이 무엇인지 민재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묻지 않았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민재의 이혼은 말로만 듣던 육체의 배고픔을 현실화시켰다. 혼자서 자신을 위해 아등바등 음식을 챙겨 먹는 습관을 들이지 못했던 민재는, 연봉이 억대인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진짜로 배고픔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침마다 삶은 계란이나 샌드위치로 민재의 허기를 달래준 하은에게서 어머니의 따뜻한 정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치매가 심해질 때면 하은을 첫사랑으로 착각하면서 온순해지는 아버지를 보며, 하은이 고졸 조무사이긴 해도 학자였던 아버지의 관심을 이끌어낼 정도의 무슨 장점이라도 가지고 있는 줄로 민재는 순간적으로 착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치매, 그리고 민재의 이혼은 불과 일 년 사이에 일어났다. 하은과의 의미 없는 섹스를 통해 자꾸만 민재 자신을 속물적인 사내로 만들어버리면 온갖 불행들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외롭고 배고팠던 민재는 성욕을 하은에게서 푸는 것으로 그의 우울함을 달래고 무작정 위로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경이 주는 신뢰할만한 평화로움과 아늑함을 하은은 민재에게 줄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은과의 섹스를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할 것까지도 없다. 그때는 그러했고, 상황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라는 구성 요소에 변화가 생기면서 지금은 이러한 것일 뿐이다.
민재는 현경과 이렇게 둘이 있는 시간이 자꾸만 달콤하게 느껴진다. 하은의 생각 같은 건 나지 않는다. 다른 생각 따위 들어설 틈을 주지 않고 온통 이 여자에게 전념해버리게 만드는 마력 같은 것을 현경은 갖고 있었다.
예전에 신화병원 수술실에서 직장 동료로서 마주할 때는 매사에 믿음이 가고 철저한 동료라는 인상이 강했다면, 요 며칠 사이 현경에게선 내 여자로 만들어버리고 싶을 만큼 탐이 나는 멋있는 여자라는 인상이 강해지고 있었다.
아무 하고나 쉽게 말을 섞지 않는 민재 아버지의 마음에도 흡족하게 들었다는 점 또한 현경의 능력으로 보였다. 어머니 생전에 현경을 보셨더라면 어머니 역시 현경을 마음에 들어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현경을 바라보니, 그녀가 더 살뜰하고 지혜로운 여자로 보인다. 이런 여자라면 안방을 내어주어도 괜찮겠구나 싶은 생각마저 일렁인다.
"현경씨는 간호사 일이 좋은가요? 계속하고 싶어요?"
"아니오~ 저는 병원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었어요. 그래서 대학원에 진학하려고도 생각했었는데, 살다 보니 기회를 놓친 거 같아요. 어릴 적 꿈은 그냥 현모양처로 사는 거였어요. 자기실현이나 생계를 위해 직장을 갖고 싶은 마음보다, 어른들 모시고 자식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며 오순도순 살고 싶었어요. 아마 집을 나간 엄마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이러니한 건 또 집 나간 엄마 때문에 평생 전문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는 거예요. 참 이상하죠?"
산책길의 끝 지점에서 다시 돌아 걸어 나오며, 민재는 어린 시절의 현경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여자를 앞에 두고 그녀의 어린 시절이 궁금해지는 것도 처음이었다. 까만 밤 위에서 달은 거의 둥글어진 원을 그리고 있었다. 고작 십여분의 산책으로도 민재는 보름달처럼 충만한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