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망과 선배

by 도라지

어제는 지체 높은 선배님께 전화가 걸려왔다. 몇 해 전만 해도 몇 분 선배님들께는 새해 인사를 문자로나마 드리며 살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형식적인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몇 년 후면 퇴임을 앞둔 선배님은 천안에서 근무하고 있다. 또 한 분의 지체 높은 선배님이 공교롭게도 같은 지역으로 발령이 나서, 우리는 천안에서 한번 회동하기로 작년 여름부터 약속을 해놓고 여태껏 미루고 있었다.


두 분이 식사하셔도 될 것을 구태여 청주에 있는 나를 천안으로 초대하는 것에 대하여, 사회적 관계의 중요성을 아는 우리 집 남편은 흔쾌히 찬성하는 입장이다. 나를 가리켜 할망이라고 부르는 남편이 보기에, 아직도 남자 선배들이 당신의 할망 마누라를 여자로 예우해주는 것 같아서 그게 대견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한 모양이다.


남편은 나더러 참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면박을 주기도 하지만, 내가 집 밖에만 나가면 무척 재밌고 유쾌한 사람이라는 것을 구태여 남편에게 설명하진 않는다. 남편 앞에서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는 이유와 내가 밖에서 더 재밌는 사람이 되는 이유를 나도 캐고 싶지가 않다. 꽃 피는 삼월의 어느 금요일 저녁으로 아예 약속 날짜를 정해놓고, 천안의 호텔을 검색해보았다.

내 나이 사십 줄에 한창 같이 어울리던 선배들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기도 하고, 게다가 나까지 거진 다 늙어서 철학 공부한답시고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선배들과의 술자리는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거기에 코로나까지 터지면서, 어느새 나는 오십삼에 이르렀고 선배들도 그 사이 더 나이 들었다. 코로나가 허망하게 삼켜버린 지난 이년이라는 시간은 우리들 모두의 인생에서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이제 자식 놈들 키워놓고 조금 시간의 여유를 부려 보나 싶었을 때 터진 코로나 덕분에, 그동안 갱년기 아줌마의 관절은 더 녹슬었고 노화된 피부만큼이나 기분도 더 우울해지고 침체되었다.


선배들은 여전히 내가 유쾌하고 재밌을 것으로 기대하고 초대하는 것일 텐데, 요즘 들어 매사에 두루 자신이 없어진다. 이년 사이 너무 늙어버린 나를 보고 실망할 수도 있는 선배들의 얼굴이 떠올라, 평소엔 하지 않던 팩을 얼굴에 붙이고 티브이를 보았다.


젊은 시절의 휴 그랜트가 동성애를 연기한 <모리스>라는 영화를 보는데, 동성을 사랑하든 이성을 사랑하든 왜 젊음이 그 자체로 빛나고 아름다운 건지 가슴이 미어지게 이해가 되었다. 우리들에게도 때 싱그러운 아침 같은 청춘 시절이 있었다는 기억이 아득하고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때 우리는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정말 누군가를 사랑했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가지고 있던 안목들이 얼마나 볼품없었는지 지금은 선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지만, 촌스러운 생각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일망정 다시 한번 청춘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았다.


부질없는 생각들은 사람 몸에서 기운을 빼앗아 가므로, 이 나이 먹어서는 생각조차 선별해서 담아두어야 한다. 건강한 할망으로 살려면 착하고 욕심없는 마음으로 살아야한다. 부질없는 생각보다는 차라리 현실적인 착각을 하는 편이 이롭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예쁜 여자가 아니어도 나를 아직도 보고 싶어 하는 선배들이 있어서, 오늘 내 기분은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런 착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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