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공

by 도라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날, 내 머리도 거의 폭발할 지경이었다. 얼마 전부터 머리가 줄곧 아팠었는데, 지난주 금요일 작은 아들의 장학금 면제 소식을 듣고 드디어 뚜껑이 확 열려버렸다.


한번 열린 뚜껑이 닫히질 못하고 우크라이나가 침공당한 날까지 폭주하고 있었던 듯싶다. 지난 학기에 18학점을 이수한 아들 녀석은 전 과목 A+ 4.5만점을 받았다. 교내 장학금 규정상 과톱의 성적임은 확실했으나, 조교가 제출하라고 했던 포트폴리오를 제출하지 않아서 녀석의 장학금이 통째로 날아갔다.


태생적으로 약하게 타고난 내 심장은 평생토록 속 썩는 일들만 그득했던 주변 환경 덕분에 극도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지난 육 개월 동안 무리하게 폭주하듯 써 내려갔던 글쓰기에 급기야 두뇌마저 과부하에 걸리고야 말았다. 내 타고난 용량을 모르는 바도 아니면서, 한 가지에 빠지면 미친 듯이 전념하는 내 기질의 약점은 결국 몸에 병을 불러오고야 마는 꼴이 되었다.


몸은 신기하게도 어디가 한 군데 아프면 몸 전체가 같이 아프게 된다. 아날로그형 인간답게 삼 년 만에 좀 멀리 계시는 한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다. 동네 한의원처럼 소침을 놓지 않고 중침 정도 놓는 한의사 선생님은, 침술도 침술이지만 정신세계가 매우 훌륭하신 편이다. 환자들에게 일일이 고승처럼 몇 마디 주시는 말씀 속에서, 나는 잠시나마 마음에 평화를 구하고 온다.


선생님의 침에 효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그분의 말씀에 위안을 얻은 건지, 그도 아니면 한약을 먹으며 시간이 흐를 만큼 흘러서 그런 건지 나의 폭발할 것 같던 두뇌는 조금씩 뚜껑이 닫히고 있는 기분이다.


우크라이나가 침공당한 날, 남편은 머리가 아파서 간신히 몸을 움직이며 밥을 하고 있는 마누라에게 우크라이나에선 할머니도 지금 총 쏘는 걸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남편은 마누라 앞에서는 진실도 가벼운 농담처럼 바꾸어 재밌게 이야기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다.


남편의 화두에 화들짝 놀라는 제스처를 보여주거나 대꾸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날 나는 우크라이나 할머니가 총을 배우든 할아버지가 전쟁터를 나가든 상관할 기력이 남아 있질 않아서 남편에게 아무 리액션도 주지 못했다. 그날은 대한민국의 어느 중소도시에 살고 있는 늙은 아줌마도 그녀의 살아온 삶의 무게에 침공당해 쓰러져있던 날이었다.


늙어가는 엄마가 겨우 몸을 추스르고 있는데 장학금을 날려버린 작은 아들이, 엊그제 밖에서 만나고 왔던 친구가 코로나 양성이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부랴부랴 약국에 가서 자가진단 키트를 사서 검사한 결과 다행히 음성이 나왔지만, 불안한 아들 녀석은 스스로를 녀석의 방에 격리시킨 채 식사 때마다 녀석의 방문 앞으로 음식이 담긴 쟁반을 나르게 하고 있다.


간호사들 가운데도 간혹 코로나 양성이 나와서 집에서 격리하고 있는 까닭에, 가뜩이나 바쁜 응급실 근무에서 악마의 근무표 같은 3교대 근무를 겨우 버티고 있는 큰아들은 동생의 코로나 음성 결과가 잘못된 것이길 바라는 눈치다. 큰아들이 버젓이 작은 아들과 대화를 시도하지만, 극도로 조심성 많은 작은 아들은 집에서 KF94 마스크를 쓴 채로 톡을 보내는 중이다.


과학과 의학을 발달시킨 인류지만, 지구 상에 여전히 전쟁은 일어나고 누군가는 굶어 죽고 총에 맞아 죽기도 하며, 정체가 불분명한 바이러스에 인류는 끊임없이 공격당하고 있다. 모든 존재가 죽는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며,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더 이상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저 먼 나라의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헤아릴 수 있는 것도, 다 내가 살아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무기에 침공당하고, 인류는 바이러스에 침공당하고, 늙은 아줌마는 알 수 없는 삶의 불안에 침공당했다. 너희 땅을 내가 갖겠다는 욕심, 새로운 실험을 통해 무언가를 개발하려는 욕심, 삼류 소설이라도 써서 돈 되는 작가가 되어보겠다는 욕심, 이들 침공은 하나같이 욕심이라는 공통된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내가 있어야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든 생명은 존귀한 존재인 건 분명하지만, 푸틴은 너무 장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니면 삼류 작가의 꿈마저 버린 늙은 아줌마처럼 욕심을 다 내려놓으셔야 할 텐데, 푸틴씨는 그리 되기는 매우 힘들 것 같다.


푸틴과 우크라이나 국민들 걱정에 앞서, 삶의 불안과 근심에 쓰러져있는 나부터 일단 살 궁리를 찾아야겠다. 한 존재가 일생토록 평화롭게 산다는 건 지독히도 어려운 일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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