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자동차들이 빨간색 신호등 앞에서 멈춰 서있었다. 바쁜 일도 없는데 지금 가야 할 목적지에 도착할 생각만을 하는 나의 성향을 바꿔보려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세상을 일부러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주둥이에 나뭇가지 하나를 길게 문 새 한 마리가 신호대기 중인 차들 쪽으로 날아오는가 싶더니, 이내 도로 옆에 서있는 키가 큰 나무 위로 올라 앉았다. 가로수 꼭대기에는 제법 큰 까치집이 하나 올려져 있었고, 녀석은 벌써 완성된 듯 보이는 제 집을 더 탄탄하게 보수 공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까치에게 집 지을 공간을 내주고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가로수가 다른 나무들과 열을 맞춰 나란히 서 있는 맞은 편으로, 오른쪽 인도에는 종이상자를 손수레에 싣고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인도 옆에 붙어있는 어느 사무실에서 차곡차곡 정리해서 내놓은 종이상자를 할머니가 구부정한 어깨로 열심히 주워 담고 있었다. 수레에 상자를 싣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뒤에서 노인용 보행기를 밀고 있는 다른 할머니가 걸음을 멈춘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셨다.
일 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외부 강사들은 새학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제출할 서류들이 매번 해마다 반복된다. 서류를 제출하러 고등학교에 주차를 하고, 차 안에 앉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마저 듣고 있을 때였다.
개학 전이라 학교에는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인조 잔디가 깔려있는 텅 빈 운동장에 산책하러 나온 한 여성이 운동장과 맞붙어 있는 주차장 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여성은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내 앞에 주차되어 있는 차 옆으로 다가가 슬며시 바지를 내리며 앉았다. 차 안에 사람이 있는 줄도 모르고 소변을 본 여성은 다시 바지춤을 추스르고 운동장을 향해 걸어갔다.
신체의 동작과 얼굴을 종합하여 볼 때, 여성의 나이는 어림짐작하여 칠순 정도였을 것이다. 나무들이 운동장과 주차장을 나누는 울타리 역할을 하고 있는 주차장에 내려앉은 오전 열 시 삼십 분의 햇살은 눈부시게 찬란하고 푸르렀는데도, 여성은 아무 눈치도 보는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젊었던 한 때는 이소라의 발성이 약간 갑갑하게 느껴져서 그녀의 음악을 높게 평가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정수라와 이선희 같은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시원시원하게 여겨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서건 이소라의 노래만 나오면 하던 것을 멈추고 그녀의 음색에 빠져든다. 그날도 이소라만 아니었더라면, 70대 여성의 민망한 노출신을 구태여 목도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방광염, 혹은 요실금 등으로 고생하는 많은 여성들은 장거리 여행을 꺼려하게 된다. 굳이 그런 증상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나이 든 여성들의 괄약근은 생태적으로 느슨해져서 화장실을 빈번히 찾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큰 운동장을 시민들을 위해 개방하고 있다면 시에선 당연히 학교 재단 측과 협의하여 여성들을 위해 화장실을 개방하든지, 그도 아니면 작은 화장실이라도 설치해주는 게 옳지 않을까, 그게 성인지 예산의 적절한 쓰임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축적한 부도 많지 않고 팔팔한 신체의 기력도 많지 않은 채로 늙어가는 나의 눈에는, 종이상자를 실은 수레를 끄는 칠십 대 여성과 아무데서나 바지춤을 내리며 소변을 보는 칠순 여성들의 모습이 모두가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비친다.
일상은 끊임없이 나에게 수행해야 할 임무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삶을 단지 수행해야 할 일들의 연속으로만 보아선 안될 것 같다. 인생이 책임과 임무의 선상 위에만 있다면, 삶은 불안해지고 조급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장소 불문하고 바지춤을 내리며 소변을 볼 수밖에 없는 여인처럼 어차피 인생은 곤궁하다 할지라도, 오늘 나는 아직 요실금이 없을 때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며 어디 조금 먼 곳으로 혼자 드라이브라도 다녀오고 싶다. 가끔 인생의 어느 하루는 모든 일상의 임무에서 벗어나 내 마음대로 드라이브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오늘은 햇살이 참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