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좋은 엊그제였다. 이소라의 노래를 듣다가 어디 조금 먼 곳으로 혼자 드라이브나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그날, 나는 드라이브 대신 <드라이브 마이 카>라는 제목의 영화를 보았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원유값이 급등하고 있는데, 혼자 기분 내자고 기름값을 지출하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남편이 운전해주는 차에 편히 타고 다니던 습관에 길들여진 탓이었을까. 혼자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다는 생각은 늘 생각으로만 그치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정보만 가지고 무작정 들어간 상영관에서는, 첫 장면부터 남편과 섹스를 나누며 글(이야기)을 전개시키는 아름다운 여성의 나신이 스크린을 가득 채우며 영화가 시작되었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 영화의 초반에서 남녀의 정사 장면을 몇 차례에 걸쳐 예술적으로 배치하고 있는데, 그것은 주인공 가후쿠의 아내가 섹스를 나누며 이야기를 창작해내는 기묘한 글쓰기 방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류스케 감독은 정사의 장면에서도 적나라하게 여성과 남성의 나신을 노출시키지는 않지만, 관객들의 상상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충분히 카메라의 앵글을 몽환적으로 이동시킨다. 그래서일까, 평소에 아트하우스 상영관 답지 않게 관객의 절반이 남자들이었다. 오후 세 시에 시작된 영화가 저녁 여섯 시가 되어서 끝이 난 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관객 수는 나를 포함하여 총 열 명이었다.
무슨 특수부대 출신의 대원도 아니면서, 나는 상영관에 앉아있는 관객들의 머릿수를 헤아려보는 버릇이 있다. 주로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상영하는 아트하우스 상영관에는 시간대 불문하고 관객 수가 열 명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서울 지역은 예외이다. 예전엔 청주에서 상영하지 않는 영화를 보기 위해 서울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가서 관람하고 온 적도 있었다.
아주 오래된 차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중년의 연극배우 주인공 가후쿠는, 젊은 시절 배우를 하다가 결혼 후 네 살 된 딸아이를 잃고 나서 글 쓰는 일을 시작하게 된 아내가 이년 전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져 죽은 뒤, 히로시마의 연극제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된다. 가후쿠를 초청한 히로시마의 주최 측에선 가후쿠가 히로시마에 머무는 두 달 동안 그의 차를 운전해 줄 운전수를 고용하고, 타인에게 그의 차를 운전하도록 맡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던 주인공은 임시 고용된 운전수의 드라이브 실력을 테스트한 뒤 그녀를 운전수로 채용하는 것에 동의하게 된다.
가후쿠는 자신만이 그의 인생을 드라이브할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차 역시 그만이 드라이브해야 한다는 일종의 법칙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아내가 죽은 후에도 그의 오래된 차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담긴 연극 대본의 녹음테이프를 듣는 일상은 아내가 죽기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자기만의 법칙을 가지고 살아가는 주인공 앞에 그의 차를 맡겨야만 하는 운전수가 나타났다. 운전수 미사키는 고향에서 엄마랑 단 둘이 살다가 산사태로 집이 무너지면서 엄마가 죽고 난 뒤,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운전을 해서 무작정 히로시마로 오게 된 스물세 살의 여자이다.
아내가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져 죽던 날, 딸아이를 잃고 난 뒤의 슬픔과 상처로 다른 남자들과의 외도를 선택했던 아내 오토는 주인공 남편에게 그날 저녁 대화를 나눌 수 있느냐고 물었었다. 남편 가후쿠는 이미 아내의 외도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단 한 번도 그것에 관해 아내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조금 더 일찍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의 대화가 두려웠던 가후쿠는 도로 위에서 그의 차를 운전하며 선뜻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그 시각에 집에서 쓰러진 아내는 병원에 가면 살 수도 있었을 시간을 놓쳐서 죽게 되었다.
주인공 가후쿠와 운전수 미사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과 상처 속에 자신들의 후회와 잘못을 집어넣고 살아가는 공통적인 분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묘사된다. 자신들의 상처 속에 고립된 채로 살아가던 가후쿠와 미사키는, 가후쿠의 오래되고 소중한 자동차를 미사키가 운전하도록 넘겨주는 "소통"의 행위를 통해서 그 두 사람이 구원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다. 딸아이를 잃은 서로의 상처와 슬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 두려워서, 그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어 볼 용기를 내지 못했던 데서부터 가후쿠의 고립과 단절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닮아있는 상처를 고집스럽게 간직하며 살아가는 가후쿠와 미사키는, 결국 자신들의 상처를 정면으로 들여다볼 용기를 가지게 되면서 자신과 화해하게 되고 그들의 고립과 단절로부터 나오게 된다. 그리고 가후쿠가 히로시마 연극제에 올리는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에 나오는 대사처럼,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삶들을 또 열심히 살아가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루키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의 고립과 단절이 불러오는 더 큰 슬픔과 상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타인과의 '소통과 교감'이야말로 슬픔과 상처들로 얼룩진 우리들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대화의 부재는 단지 '언어의 부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히로시마 연극제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 등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오디션을 통과하게 되고, 심지어 수화를 쓰는 벙어리 여자 배우마저 등장하고 있다. 고립과 단절은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장치로 해석되는 지점이다.
자신만의 법칙과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서 타인에게는 결코 운전대를 맡기고 싶지 않은 '마이 카'는, 외부 혹은 타인과의 진실된 소통을 하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립과 단절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후쿠의 차 안으로 운전수 미사키가 들어오고 아내 오토의 불륜 상대였던 젊은 남자 다카츠키도 들어오게 되면서, 주인공의 고립과 단절은 서서히 화해와 치유의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 영화에서 더욱 날카롭게 파악해야 할 것은, 모든 대화의 출발은 나 자신과의 대화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하루키는 나의 상처와 슬픔을 비밀스럽고 고독하게 혼자서만 간직하고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마이 카'를 통해서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외부에서 발생된 어떠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순간에 부닥쳤을 때도, 결국 그 문제를 해결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 역시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마이 카'라고 운전수 미사키를 통해 대신 전달하고 있다. 모든 문제의 시작과 해결은 결국 내 자신 속 '마이 카' 안에 있다. 나 자신과 화해하는 일부터 우선되어야, '마이 카'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동승하는 것을 허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가후쿠처럼 외부와 소통하는 것을 꺼려하고 혼자만의 상처와 슬픔 속에 굳게 닫힌 '마이 카' 하나를 품고 사는 건 아닌지, 영화관 주차장 무인 정산기에 천오백 원을 결제하면서 그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나왔더라면, 5분 차이로 억울하게 천오백 원을 더 결제하지 않아도 되었다. 어디 조금 멀리 드라이브도 가보지 못하고 얄궂게 주차장 요금을 결제한 늙은 아줌마는, 약이 바짝 오른 채로 리얼 마이 카를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와 부리나케 저녁상을 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