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쪽에는 매화꽃이 지천으로 피었을 터인데, 삼월 하순의 토요일에 청주는 오전에는 비가 내리더니 온종일 심술 난 노인네처럼 칙칙하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장성한 두 아들이 벅적거리는 집안에서 남편마저 거실 소파를 점령하고 있는 날에는, 내가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결국 안방뿐이다. 내가 쓰던 책상이 있던 방에 큰아들의 대형 피시가 떡 하니 자리 잡은 뒤로, 나는 주로 식탁을 책상처럼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내일까지가 브런치북 AI클래스 프로젝트 응모 마감이다. 그동안 써놓았던 글들을 브런치북으로 엮어야 하는데 작업할 공간이 없어서 기어이 안방으로 들어왔다.
안방 옆에 조그맣게 세탁실로 꾸며진 곳에 놓여있던 원형 탁자를 안방으로 끌고 들어왔다. 브런치에 쓰는 글들은 휴대폰으로도 직접 써서 올리는 게 가능한데, 브런치북 편집은 휴대폰에서 잘 되지가 않는다. 노트북을 펼치고 글들을 정리해서 브런치북을 편집해야 하는데, 베란다에 있던 작은 원형 테이블과 안방의 자투리 공간 속에서 갑자기 떠오른 "골방"의 이미지가 연상이 되어 또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말들을 풀어내고 있다.
나는 내 방 하나, 내 책상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은 고등학교 철학 강사이며 신출 작가다. 게다가 남편 사무실 업무까지 재택근무로 처리하는 사람인데도 그 잘난 책상 하나가 없다. 이러면 그것을 가슴 아파하는 친구가 책상이라도 하나 사서 보내줄까 봐 미리 염려되어 드리는 말씀인데, 이것은 책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아파트 공간에 함께 살고 있는 인원수의 문제라는 점이다. 책상을 보내주셔봤자 들여놓을 데가 없다. 이 집에서 한 사람을 내보내는 편이 최고로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집의 안방은 몇 시간 동안 나의 골방이 되었다. 히브리어 원본을 라틴어로 번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성 제롬이 사자 발톱에 박혀있던 가시를 빼주었다는 일화가 있어서 그런지, <골방 안의 성 제롬>이라는 그림 속에선 오른손에 펜을 쥔 채로 작업하고 있는 제롬 성인이 책상 앞에 앉아있고, 그의 전면으로 개 한 마리와 함께 사자 한 마리가 골방 바닥에 엎드려 있다. 나는 그림 속 제롬 성인처럼 아주 늙은이도 아니고 커다란 사각 책상은 물론이거니와 개 한 마리와 사자 한 마리를 데리고 있지도 않지만, 은밀하게 집중할 수 있는 나만의 골방을 잠시 얻었다.
우리가 가끔 공간의 형식이나 용도에 구애받지 않고 급한 대로 공간을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는 것은 인간의 창조적인 두뇌 활동 때문이 아니다. 자연세계의 동물들은 공간 속에 어떠한 형식이나 용도를 부여하지도 않는다. 나는 공간을 분류하는 인간의 창조적인 두뇌 활동보다는, 차라리 공간 속에 형식이나 용도를 부여하지 않는 동물의 원초적인 생존 본능을 선호하는 쪽이기 쉽다.
오늘 몇 시간만 '나의 골방'이 되어버린 이곳에서, 나의 사유는 잠시 인간의 지혜로움을 향해 뻗어가고 있다. 우리가 청소년 시절에 교육이란 걸 받을 때는,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더 현명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으로 기대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시절 밤을 새워가며 읽었던 문학책 속에서 국적을 막론하고 대문호들이 그려낸 인간 군상을 보면, 현명함과 나이의 상관성보다 타고난 품성의 강화와 지속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도 같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어릴 적부터 비교적 품성이 바르고 타인에 대한 연민을 품을 줄 아는 인간이 어른이 되어 늙어가면서도 세상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보낼 줄 아는 현명한 노인으로 늙어간다는 소리다.
나는 지금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구태여 따지자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 가까운 논리일지도 모르겠다. 하고많은 남자와 여자 사람 중에 하필이면 그 남자(아버지)의 정자를 받아 그 여자(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열 달을 살다가 세상으로 나갈 때가 되어 그 여자의 자궁 밖으로 삐죽이 머리를 내밀던 순간부터, 나는 이미 그 사람의 성품은 엔간히 정해져 있다고 믿는 편이다.
물론 후천적 요인으로 작용하는 환경에 의해서 사람은 지대한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품(soul, nature)이 영향을 받는다기 보다는 성격 형성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내가 심리학자가 아니므로, '사람과 상황과 때'라고 부를 수도 있는 주변 요인들이 거론되어야 할 환경적 관점과 신체의 생리학적 관점까지 함께 고찰되어야 할 '성격(personality)'에 관해선 깊게 거론하지 않으려 한다. 정확히는 거론할 재주도 없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는 성품과 성격의 차이에 대해서도 엄격하게 학문적 잣대를 들이대어 재단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냥 내 개인적인 잡(雜) 사유일 뿐이므로, 내가 여기에서 성품을 soul이나 nature로 보는 것에 관해서도 시빗거리로 분류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지금 이 글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성품과 성격의 차이를 밝히려는 게 아니고, 본성이 따뜻하고 지혜롭게 태어난 놈이 늙어서도 따뜻하고 지혜롭기가 쉽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다.
그렇다고 내가 세상살이에 영특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내가 공연한 주제를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누군가 내게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라고 묻는다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럼 또 누군가 반박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곱 살 지능을 가진 스물네 살 여자가 행복하다면, 그녀를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요?" 그 질문에 나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행복은 절대적 기준이란 게 없소. 그녀는 만족할 줄 아는 품성을 가진 것이고, 만족하기에 행복한 건 맞소.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행복할 순 있어도, 행복한 모든 사람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말할 순 없소. 행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역동적이기 때문이오."
비록 나의 생각이지만, 지혜로운 자가 행복하다는 말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 분명하다. 우리의 인생은 자연의 법칙을 따른다. 요즘처럼 인공지능이 발달한 사회에서 '자연을 닮은 인간'이란 문구가 순간적으로 생경하게 들리기도 하겠지만, 생로병사의 순리는 과학과 기계문명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이다. 인류가 노화되지 않고 영원히 젊은 채로 죽지 않고 불멸의 삶을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오지 않는다.
다른 행성에서는 어떠한 법칙이 작동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지구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지구의 자연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늙은이가 모두 지혜롭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작품 속에서 늙은이의 얼굴과 몸으로 묘사되고 있는 제롬 성인은 분명 지혜로운 늙은이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자신이 부여받은 능력을 활용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면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기에 행복에 도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나는 오늘 공간을 분류하지 않는 동물의 본능에 귀의하여,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위' 자체에만 목적을 두고 집중하고 있다. 글을 쓰는 행위는 여기까지만 해야 하고 바로 브런치북 편집을 해야 하는데, 편집 행위보다는 글 쓰는 행위가 더 하고 싶어 지는 것은 왜일까. 공간을 분류하는 기능과 브런치북을 편집하는 기능은 어쩐지 비슷한 기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내 두뇌는 공간을 분류하는 인간형 두뇌보다 공간을 통합하는 동물형 두뇌에 가까워서 브런치북 편집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록 내가 동물적인 통합형 두뇌를 가지고 있는 편이긴 해도, 오늘 몇 시간 동안이지만 '안방의 골방화'는 내게 사유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의 행복을 느끼게 해 준다.
어느덧 베란다 창밖으로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세상살이의 온갖 것들을 분류하는 인간인지 아니면 그저 자유로운 동물인지도 구분 못하는 불분명한 체계 속에 나를 남겨둔 채 시계를 들여다본다. 내가 쓸 수 있는 골방의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