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프다, 코로나 오셨네

by 도라지

응급실 근무하는 큰아들에게 드디어 코로나가 오셨다. 코로나 시국에 바빠도 너무 바쁜 와중에 병원 확장까지 하는 바람에 응급실이 두 배로 커졌지만 인력 공급은 안되고, 근무하는 직원들만 죽을 만큼 어려운 시기를 겨우 버티고 있던 상황이었다. 큰아들이 차라리 며칠 격리되면 좋겠다고 입방정을 떨더니만, 결국 자가 격리로 들어갔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큰아들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 세 명이 마스크를 쓴 채로 큰아들을 피해 다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네 번에 한 번 꼴로 식사마저 거르고 근무하는 응급실 상황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이건 뭐 나라도 나가서 인권 선언문이라도 낭독하고 싶을 지경이다. 큰아들은 엄마 앞에서 실컷 불만을 토로하다가도 혹시라도 엄마가 분개하여 1인 피켓 시위라도 감행할까 봐, 말꼬리에선 언제나 그래도 버틸만하다고 긍정적인 포지션을 취한다.


3차 의료기관인 국립대병원이나 시에서 운영하는 의료원 같은 병원 응급실에 비해서 사립 종합병원 응급실이 몇 배 더 바쁠 수밖에 없는 것은 자명하지만, 병원의 이익에 앞서 직원들의 건강과 인권도 돌아보아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게 아쉬운 지점이다.


결국 간호사를 더 많이 뽑아서 1인당 환자수를 지정하고, 3교대 근무의 피로도를 절감시키는 정책을 법적으로 제도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나도 전혀 몰랐다가 내 자식이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그 고충을 함께 뼈저리게 느끼게 되고부터, 간호사법 제정의 필요성을 몇 번이고 역설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기업의 생리는 더 많은 이익 창출이다. 법인이라는 무형의 인격체 뒤에서 결국 법인의 대표자와 주주들이 노동자들의 인력을 착취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은 광주 아이파크 붕괴사고와 같은 처참한 죽음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만약에 누군가 "저 눈부신 햇살과 숲 속에 일렁이는 바람이 돈이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실제라고 믿는 사람들은 콘크리트 빌딩 숲을 빠져나와 허겁지겁 햇살이 비치는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실제로 햇살과 바람과 흙과 나무가 돈보다 가치 있디는 것을 믿지 않는다. 돈 없는 지구에서 인간은 생존해도, 햇살과 흙과 나무가 없는 지구에서 인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 소멸될 운명인데도 말이다.


대표이사 혹은 대주주는 죽어도 법인은 살아남아 또 다른 대표를 세우듯이 사람들은 죽어도 자본주의는 명맥을 유지하며 존속하는 데는, 멈추지 않는 사람들의 욕망이 계속해서 자본주의 기관차의 연료를 부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부질없는 욕망에 나 자신의 에너지는 물론이고, 때로는 타인들의 목숨마저 쏟아붓고 있는 꼴이다. 자본가들의 욕망과 노동자들의 목숨 값을 연료로 쓰고 있는 자본주의는 끝도 없이 진화할 것 같지만, 곧 임계점에 도달할지도 모를 일이다.


산에 올라갈 때는 가볍게 덴탈 마스크를 쓰고 가는 마당에, 집에서 KF94를 쓰고 있으려니 갑갑해 죽을 맛이다. 몇 평 되지도 않는 거실은 텅 비워둔 채로, 지금 우리 집은 각자의 방 속에 고립되어 있다.


웃픈 것은 달랑 작은 방 네 개 있는 집에서, 코로나 걸린 큰아들이 두 개 방을 점유하고 즐거운 격리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는 큰아들이 잠자는 방이고, 또 하나는 내가 쓰던 책상이 있는 방에 큰아들이 스스로에게 주는 취업 선물로 들여놓은 대형 피시가 있는 방이다. 녀석은 피시방 컴퓨터 부럽지 않은 대형 피시 앞에 앉아, 오늘도 슬기로운 격리 생활을 마음껏 즐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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