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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pr 08.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17

한 나라의 왕비가 죽은 것도 아닌데, 주성훈 아내의 사망 소식은 온갖 억측들을 달고서 삽시간에 청진빌딩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겉으로는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각자 자기의 입장에서 그 여자의 죽음이 몰고 올 또 다른 파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재희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이은정에 대해 그녀가 가져야 할 태도의 전환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은정을 바라보던 주성훈의 눈빛 속엔 단지 암컷을 탐하는 수컷의 본능만 있는 게 아니었다. 경외의 대상에게 보내는 그런 눈빛을 가지고 있던 과거의 한 남자가 재희의 뇌리 속에 퍼뜩 스치며 지나갔다.


주민국에게서 취할 것은 다 취한 신재희는, 나이 많은 주민국이 젊은 사람들보다 먼저 하늘나라로 갔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같았다. 이제 얼마 있으면 팔순을 바라보는 주민국이 삼 년마다 천만 원을 호가하는 산삼을 먹어가면서도 단 한 번도 재희에게는 백만 원짜리 산삼 하나 건네주지 않는 것을 보며, 저 혼자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리는 노인네의 고약한 심보라고 재희는 속으로 욕을 했었다. 하지만 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주민국의 시대는 이미 막을 내렸으며, 그의 아들 주성훈은 한낮에 타오르는 붉은 태양이었다.


수련관에 앉아 명상을 하던 박태성은 이대로 이은정이 주성훈의 여자가 될 수도 있다는 계산이 서자, 나이도 어린 주성훈을 주군으로 섬겨야 할 자신의 입장을 돌아보며 은정에 대해서도 마음을 완전히 접어야겠다는 재빠른 판단이 서기도 하였다. 한 여자의 죽음은 어떤 여자에겐 기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외가가 있는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던 주성훈의 아이들은 엄마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틀 후에 한국에 도착했다. 아빠를 보기 위해 삼 개월에 한 번씩 미국에서 한국으로 나왔던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식은 아이들에겐 커다란 충격이긴 했지만, 자동차 안에 다른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은 아빠인 성훈보다 슬픔을 더 잘 견디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제법 사회적으로 많이 가진 사람의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사회적인 절차들이 그에 상응하여 복잡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성훈의 아내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죽음을 단 한 번도 상상한 적이 없는 매우 건강하고 부유한 여자였지만, 미국 사회에서의 전통에 따라 그녀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에 대한 부분 등을 미리 유언장으로 공증해놓았다.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아내의 재산에 관해 법률적으로 처리해야 할 문제부터 현재 미국에 있는 아이들의 교육 문제까지, 거기에 당사자들은 고인이 되어 없으므로 고속도로 역주행 사망사고의 경찰 조사에 대한 협조까지 성훈이 처리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 같았다.


아내의 장례를 정신없이 치르고, 며칠 뒤 성훈은 무작정 차를 달려 아무 곳이라도 가야만 했다. 사물들이 거기 있는 것을 분명히 보고 있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에 아무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때가 있다. 성훈은 모든 법률적인 문제들을 뒤로 남겨 둔 채로, 단 하루라도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슬픔을 오롯이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으로 도시를 빠져나갔다.


차를 달려 낯선 마을에 도착한 성훈이 한가한 곳에 주차를 하고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주위를 바라보았다. 세상은 하늘 위에 떠도는 구름처럼 어디로든 흘러가고 있었. 있어야 할 곳에 모든 것들이 알맞게 있는 것 같았다. 수풀 속으로 하얀 나비가 날아다니고, 온갖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등에 얼룩덜룩한 줄무늬가 있는 고양이가 수풀 속을 응시하며 몸을 낮게 웅크린 채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움직였다.


푸른 하늘 저 멀리로 교회의 첨탑이 보였다. 교회의 몸통은 다른 건물들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언덕 위에 솟아있는 듯한 교회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노란색 양말을 신은 하얀 강아지가 길가 옆으로 낮게 깔려있는 풀밭을 밟으며 근심 없는 얼굴로 지나갔다. 햇살을 가리느라 차양이 넓은 모자를 쓴 여자가 느슨한 옷차림으로 노란 양말을 신은 강아지와 함께 햇살 속을 유유히 걸었다.


성훈이 이 모든 주변의 것들을 하나씩 둘러보는데, 마치 태어나서 처음 보는 세상처럼 모든 게 낯설고 신비로웠다. 성훈의 아내는 도시의 가로등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서서 미리 세팅된 저녁 시간에 라이트를 켜듯이, 성훈에게 일정한 간격으로 미세한 고통을 주던 여자였다. 삼 개월마다 한국에 나온 이유가 남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남자를 만나기 위한 여정이었음을 성훈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난생처음으로 세상이 주는 신비로움을 목도한 성훈의 머릿속에 구름처럼 한 여자의 얼굴이 흘러갔다. 자연이 주는 위로를 받기 위해 길을 떠난 성훈이 깨달은 또 하나의 자연이며, 우연히 닿은 곳에서 마주한 따사로운 풍경 같은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성훈은 다시 집과 회사가 있는 그의 도시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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