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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r 30.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16

한 사람이 하나의 인생을 살다가는 것은, 하나의 우주가 탄생했다가 소멸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미처 알지도 못하는 어느 항구를 떠밀리듯 출발하여, 알 수 없는 또 다른 항구를 향하여 항해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가 생존해있는 시간 속에서 느꼈던 생의 아름다움에 대한 크기만이 살아남아, 생전에 그가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 두기라도 했던 것처럼 남아 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 나무 하나를 전달하고 가는 것이다.


은정은 할머니 병간호하느라 십 년, 그리고 갑작스레 산재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느라 다시 십여 년을 보내고 결국 남은 생의 동반자처럼 찾아온 병마와 함께 사느라 마지막 인생을 허무하게 살다 간 어머니의 삶을 곱씹어보았다. 그래도 삶의 마지막까지 세상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저버리지 않았던 어머니는,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에 충실했었던 것도 같다. 어머니는 고통 속에서도 감사해하고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은정의 어머니 장례식은 천주교의 장례 절차를 따라 조용하고 순조롭게 흘러갔다. 은정의 외가에는 외사촌 가운데 신부와 수녀가 세 명 있었다. 언니와 결혼할 때 세례를 받았던 형부는 이제 평신도 사도회를 이끌어갈 만큼 어엿한 신앙인이 되었다. 조선에 처음 천주교가 전파될 때는 제례문화에 대한 엇갈린 시선이 있었다지만, 요즘은 천주교의 전통이 장례문화의 미풍양속을 선도하는 것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그나마 종교가 위로해주고 있었다.


청진빌딩의 사람들이 대부분 장례식장을 다녀갔다. 주성훈은 장례식 첫째 날 청진 일보 대표로서 근조화환을 보내왔으나, 결국 장례식장에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주성훈이 일일이 이런 장례식장까지 찾아다닐 만큼 한가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은정과 아무 연관도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면서도, 은정은 조문객들이 올 때마다 자꾸만 유심히 복도 끝쪽을 내다보았다.


어머니 상여를 모시고 행상 나가는 날, 하늘에서 하염없이 꽃비가 내렸다. 벚꽃을 유달리 좋아했던 어머니를 운구하는 리무진 위로 하얀색 벚꽃잎들이 소리 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납골당에 어머니를 안치하고 돌아오는 길에도 꽃잎들은 아직도 하늘 위에서 맴돌았다.


은정이 꾸에로에 다시 출근을 하기 시작한 날, 2층 사과나무의 진현주가 공방을 찾아왔다.


"은정씨, 얼굴이 반쪽이 되었네요. 돌아가신 분은 좋은 데로 가셔서 편히 계실 거라고 믿고, 이젠 은정씨 자신을 돌봐야 해요. 우리처럼 남자 없이 사는 사람들은 내 몸 내가 챙겨야 해요. 그런데, 상 치르고 온 사람한테 이런 말 해도 되려나 모르겠네요. 별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서.. 글쎄, 주성훈 대표 아내가 죽었대요, 교통사고로요. 아마 은정씨 어머니 돌아가신 그즈음이었나 봐요."


"네? 정말로요?"


"그래요, 내 동생한테 직접 들은 얘기니까 거짓 소문은 아닐 거예요. 박관장님도 모르고 있었나 보더라고요. 그게 그러니까 말이죠, 사모가 타고 있던 차에 어떤 남자가 같이 타고 있었는데, 역주행하는 차에 부딪혀서 사고가 났다고 하더라고요. 역주행한 차 운전자는 멀쩡히 살고, 이쪽만 둘 다 죽은 거라네요."


진현주는 억울하게 죽은 두 남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건지, 아니면 그 죽음의 뒤에 있는 두 남녀 관계에 대한 진실이 궁금한 건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은정에게 좋은 선물이라도 건네준 것처럼 소식을 전하고는 총총히 문 밖으로 사라졌다.


은정은 그제야 성훈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오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성훈의 충격과 슬픔이 얼마나 클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성훈이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은정은 성훈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는 입장이다. 두 사람을 설정하는 사회적 관계망이 없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고 있는 순수하고 고귀한 인간적 관심조차 자칫 왜곡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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