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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Mar 24.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15

저것은 기회를 엿보는 자들의 눈빛이다. 성훈은 신재희와 박태성의 모습 속에서 남이 사냥해놓은 것을 호시탐탐 노리는 무리들이 갖고 있는 습성을 마주했다. 그런 무리들은 세상 어디에나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기에 별로 대수롭지도 않게 여기며, 옮기는 발걸음 하나에도 세심하게 은정을 배려하는 몸짓으로 성훈은 은정연인처럼 말루스 문을 함께 나섰다.


은정에게선 저들과 달리 인고의 세월을 초연하게 감내하는 마스터의 기운이 느껴졌다.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엿보거나 틈을 노리는 자들의 교활하고 번득이는 눈들과 다르게, 마스터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세월 속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지며 준비하는 불꽃같은 눈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마스터의 기운은 나이의 많고 적음보다는 헌신과 인내라는 시간의 길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성훈은 생각해둔 적이 있다.


은정의 탄탄하고 길쭉한 몸에서는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쓸쓸한 인고의 흔적 같은 게 강렬하게 풍겨 나오고 있었다.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찾게 되기를 갈망하며 길을 떠난 적이 없어도, 스스로에게 주어진 길을 혼자서 묵묵히 견딘 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진정한 마스터가 되어 있곤 한다. 


세상 사람들 눈은 은정의 아름다운 외모를 우선 보게 되기가 쉬워서,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속에 영롱하고 강인한 정신이 깃들어있음을 간파하는 것이 힘에 겨울 수도 있다. 젠체하는 현학자들, 기술적 장인들, 떠도는 구도자들을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성훈은 이제껏 살아오면서 무수히 만났던 사람들 중에 마스터의 느낌이 나는 사람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 성훈은 인생의 진리를 깨우친 스승을 찾고자 열망했던 적이 있었다. 찾고자 할 때는 나타나지 않았던 스승이 여자의 모습으로 성훈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만 같았다. 남자들은 강인한 정신을 가진 여인보다는 성적으로 강한 에스트로겐을 가진 여자를 좋아할 것이다. 하지만 성훈은 마스터 같은 면모를 지닌 은정의 불꽃같은 정신이 보기 좋았다. 이 여자는 인생에 대해 무엇이든 대답을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은정은 성훈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즐거울 뿐만 아니라, 그 사람 앞에서 온전히 그녀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이십 대에 결혼 생각까지 했던 김준수 앞에서조차도 그녀의 불꽃같은 열정을 다 드러내 보일 수가 없었다.


십칠 년의 세월이 소리도 없이 흐르는 동안 젊은 시절의 크고 붉게 타오르던 불꽃은 조금 크기가 작아지고 냉철하게 푸른빛으로 변한 듯도 지만, 여전히 은정의 안에서 타오르고 있정신불꽃은 세월의 무게와 상관없이 빛나고 있었다. 아무에게나 드러낼 수 없는 그 정신의 불꽃을 성훈에게 감추지 않고 보여주고 있는 자신이 은정은 마냥 신기했다.


사람들은 묘하게도 아름다운 것을 질투한다. 눈으로 보이는 외모의 아름다움에도 질투하지만, 보이지 않는 정신의 아름다움에는 더욱 잔인하게 난도질하며 질투를 한다. 은정은 타인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일만한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한다. 성훈과는 인생에 흔치 않은 진짜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슴 한구석에 품어보며, 은정이 그날 밤에도 혼자 잠이 들었다. 


그날 밤 꿈에서 엄마가 돌아가셨다. 혼자서 울고 있는 은정의 옆으로 누군가 다가와서 은정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 남자의 품속이 마치 돌아가신 아빠 품처럼 포근하다고 느껴질 때, 그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은정의 이마를 타고 내려와  입술에 닿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슬픔은 잊은 채로 은정은 발톱까지 긴장된 마음으로 그 남자와 진한 키스를 나누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긴장을 했던 발톱이 진짜 욱신거리며 아픈 것도 같았다. 혼자 사는 여자가 맞이하는 새벽의 고요 속에서 은정의 휴대폰이 울리고, 휴대폰에는 엄마가 계신 요양병원의 전화번호가 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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