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줄 탄다

by 도라지

휴대폰에 액정 필름을 붙이는 게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 아니던가? 플립폰에 액정을 보호하기 위해 붙여준 필름이 들뜬 것을 보고, 전자제품 살 때 떼어내야 하는 비닐 같은 물질이라고 여기고는 후딱 벗겨낸 남편이 내게 말했다.


"당신이 엊그제 내 폰 카메라는 왜 그렇게 뿌옇게 보이느냐고 했잖아, 그게 말이지 액정에 비닐 같은 게 붙어있더라고."


세상에, 도대체 신께선 어쩌다 이런 두뇌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생각이 들었다. 마누라가 그 앞에서 당장 설명을 한다고 한들, 자기의 행동을 혼내는 것으로 여길 게 뻔한 남편을 나는 그저 말없이 외면할 뿐이었다.


며칠 뒤 그건 액정보호필름이며, 플립폰이 그런 들뜸 현상이 많다는 것을 인플루언서의 글을 통해 보여주었다. 스스로 알아서 당연히 필름을 붙이러 가겠지 생각하고 기다려보았으나, 남편의 플립폰 액정은 아직도 누드 상태이다.


조그만 사무실에서 겨우 직원 두 명을 두고 사장 노릇을 하고 있는 남편이 남들 다 타고 다닌다는 외제차에 꽂혀서 큰아들과 쑥덕거리고 다니더니, 두 달 전쯤에 대형 SUV를 예약했다는 소식을 자랑스럽게 가족들 앞에서 발표했다.


똑똑하고 계산 속이 밝은 남편의 친구가 외제차 전문 딜러를 소개해주었다고 남편이 내게 말했었다. 그 친구라면 이재에 밝아서 자동차 할부금의 금리 정도 계산하는 건 일도 아닐 거라고도 믿었다. 게다가 마누라가 견적서 좀 보여달라고 해도 남편은 보여주지도 않을뿐더러, 여러 군데 파이낸셜 금리를 비교해보겠다는 마누라를 말리기까지 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부부가 2박 3일로 강원도 여행을 다니는 중에 남편의 마음이 바뀌었는지, 남편은 여행 중에 급하게 딜러에게 전화를 걸어 자동차 예약을 취소하였다.


먼길을 달려 집에 돌아와 자동차 예약 취소 소식을 알리자, 큰아들이 펄쩍 뛰며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남편에게 말했다.


"아빠가 차 주신다기에 이년 동안 기다렸는데, 또 이렇게 번복하시면 어떡해요? 그럼 제가 차를 사야겠어요."


우크라이나도 아닌데 그때부터 우리 집안은 순식간에 난리통이 되었다. 화가 난 큰아들은 큰아들대로 차를 알아보고 남편은 새롭게 꽂힌 다른 외제차 상담을 하느라 서로 분주하게 설쳐대는데, 어느 것 하나도 빨리 받을 수 있는 차는 없었다. 나는 그 가운데서 어느 쪽 금리가 더 저렴한지, 현재 우리 집 상황에서 누구 손을 들어주는 게 현명할지 계산기를 두드리며 온갖 정보를 취합하고 있었다.


똑같이 다혈질에 제 기분대로 움직이는 남편과 큰아들은 늘 한 편을 먹고 나를 적대시하기 일쑤였다. 그들이 드디어 서로의 이익이 상충되자 입장이 갈라진 채로 대척점에서 맞붙게 되었다. 두 사람의 동맹관계가 일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는데, 공연히 내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다. 자칫 폭도로 변할 듯이 사나워진 큰아들의 기세를 누그러뜨리려면 마땅한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남편은 캐피털 금리나 프로모션 등을 꼼꼼하게 따지고 비교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자신의 이익보다 오히려 판매자 딜러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다. 일명 호구 기질이 충만한 남편을 대신해 이것저것 비교해보고 깐깐하게 따지고 드는 역할은 언제나 나의 몫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것은 고스란히 우리 가정 공동체의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나와있는 자동차 출고 기간과 별개로 영업점으로 방문하여 문의해본다면, 누군가 취소한 차량을 계약할 수 있는 행운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이십 년을 보아온 딜러에게 전화를 걸어 큰아들을 영업점으로 보내고, 우리 부부는 나흘간의 전쟁터를 빠져나와 늦은 오후에 산으로 올라갔다.


영업점을 방문했던 큰아들에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어느 고객이 취소한 차량이 한 대 떴는데, 본인이 원하는 컬러와 옵션의 차량이라고 했다. 나는 아들에게 진행하라는 오더를 내리고 딜러에게도 진행 요청 승인을 해주었다.


결국 차량 구매 사건은 남편의 외제차 구매가 아니라 큰아들의 신차 계약으로 일단락 지어졌다. 처음부터 정체도 불분명한 딜러를 상대하기보다 신뢰할 수 있는 마누라에게 의뢰하였더라면, 남편은 본인이 원하는 대형 SUV 외제차를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 자신보다는 똑똑한 마누라의 의사결정에 내심 항명을 가지고 있던 어리숙한 남편의 결말이었다.


보름 전 친정 언니의 텔레비전 사건에 이어 터진 우리 집의 자동차 대란으로, 그동안 글도 쓰지 못할 만큼 정신이 쏙 빠졌었다. 혹시나 도라지가 왜 글을 쓰지 않나 궁금해하신 분이 계실 것도 같아서 적어보았다. 이 꼴 저 꼴 보며 참고 사느라, 내 똥줄이 아주 새까맣게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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