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큰 낯선 남자는 여자를 성당 옆에 딸린 마당으로 안내했다. 여자는 몇 해전까지만 해도 이 성당을 다녔기에, 이곳을 훤히 알고 있다. 잔디가 듬성듬성 깔려 있는 널찍한 마당에서는, 성당 사람들이 다 함께 어울리는 운동회가 열리곤 했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두 즐거웠다.
성당 마당은 잔디밭보다 흙밭이 더 넓게 차지하고 있어서, 한겨울이 오기 전이면 마른 낙엽들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그 즈음 저녁엔 가끔 캠프화이어가 열리기도 했던 것 같다. 해마다 부활절이면 커다란 천막을 치고 어머니들이 삶아 주신 잔치국수를 나눠 먹기도 했었다.
여자를 운동장만 한 크기의 마당에 데려다 놓고, 낯선 남자는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시간이 십여분 넘게 흘렀나 보다. 저 멀리서 하얀색 물통을 든 남자가 삐딱 삐딱하게 걸어오는 게 보였다. 그 남자였다. 여자를 따라 처음 버스에서 내린 날부터, 그 남자는 왼쪽 어깨에 큰 가방을 메고 오른쪽 어깨를 비스듬히 떨어뜨리며 걷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까 사선 모양의 어깨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오늘은 사선으로 기울어진 한쪽 어깨에 가방은 보이질 않는다. 오른팔에 무거운 물통 하나만 들려 있다. 남자가 여자 근처에 왔을 때, 석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남자의 옷은 물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차갑게 적셔져 있었다.
남자는 물통을 한쪽 옆에 내려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저를 만나주지 않으면, 불을 댕기겠어요."
남자가 라이터를 과시하듯 들어 올리는 사이, 여자는 잽싸게 라이터를 낚아챘다. 그러자 남자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발견하고 달려간다. 운동장 한 구석에 나뒹굴고 있던 소주병이었다. 남자가 병을 집어 들고 바닥에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오른손엔 깨진 병조각이 날카롭게 들려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절 다시 만나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그냥 여기서 죽어버릴 거예요."
자신의 왼쪽 손목으로 병조각을 옮겨가는 시늉을 하는 남자를 여자가 진정시켰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깨진 소주병의 밑동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었다. 그의 시나리오에는 없던 즉흥적인 상황 연출같았다. 그래도 일단은 이 상황을 모면하고 볼 일이었다. 여자의 몇 마디에, 남자가 자진해서 깨진 병의 아래 몸통을 저 멀리 집어던졌다.
하늘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젖은 남자의 옷에선 석유 냄새가 지독했다. 여자는 남자를 택시에 태워 보냈다. 석유 냄새가 택시 기사의 코끝에 닿기 전에, 여자는 택시 기사에게 오천 원짜리 지폐를 먼저 건넸다. 택시가 성당 앞에서 출발을 했다. 저녁 여섯 시를 알리는 성당 종소리가 빈 하늘에서 고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여자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석유를 남자의 옷에 뿌려주고 무대에서 슬며시 퇴장했던 교회 장로님 아들은, 주일에 교회에 가서 어떠한 기도를 드렸는지 거기에 대해선 아직도 들은 바가 없다.
남자는 동창생에게 석유를 적당히 냄새만 날 정도로 부어달라고 부탁했단다. 장로님 아들은 그날 배역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6리터짜리 석유통의 반이상을 그 남자 남방셔츠에 쏟아부었다고 한다.
장로님 아들이 퇴장할 때, 그는 준비해온 소품 하나를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남자도 이미 라이터 하나를 갖고 있었다. 얼떨결에 남자의 바지 주머니에는 라이터가 두 개 들어있었다.
그중 한 개는, 성당 운동장에서 남자로부터 라이터를 낚아챘던 여자가 가지고 갔다. 남자는 나머지 라이터 하나를 몸에 지니고 있는 것조차 무서워서, 여자가 보이지 않자 택시 밖으로 서둘러 라이터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가서 남자는 온몸에 비누칠을 두세 번 덧칠했다. 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 허리춤의 피부들이 허물을 벗고 있었다. 남방에 쏟아부은 석유가 흘러내려, 벨트를 맨 바지 허리춤에서 뒤엉켜있었던 탓이다. 남자는 일주일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다.
(2021년 9월 19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