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아침마다 그녀의 집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여자가 출근 시간을 앞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남자는 더 일찍 여자 집 앞에 도착했다.
간곡하고 예의 바르게 여자의 마음을 전달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자는 이대로 맥없이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여자는 그 남자의 자전거를 다시는 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가 자전거를 끌고 처량맞은 표정으로 버스정류장까지 세 번을 따라오고 난 뒤, 아침에 골목길에서 그 남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교생 실습 기간은 바쁘게 지나갔다. 3주째가 지나고 어느덧 마지막 주가 되었다. 학교 앞에서도 남자가 보이지 않자, 그동안 여자는 남자를 잊고 지냈다. 내일이면 교생 실습 마지막 날이다.
그날은 중학교 체육대회 날이었다. 수업이 없어도 교생들은 학교에서 근무를 하던 중이었다. 어떤 남자 교생은 아예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달렸다. 체육학과 교생도 아니었다.
여자는 교생들 휴게실 안에 앉아 있었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체육복을 입은 여학생이 배시시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교생 선생님, 누가 찾아왔어요."
여학생 뒤로 키가 크고 날렵한 몸매를 한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선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000 선생님이신가요?"
낯선 남자가 물었다.
"네, 제가 000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여자는 걱정스러운 듯 되물었다. 교생 실습을 하고 있는 학교에, 난생처음 보는 남자가 날 찾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학교까지 왔을까?
그 남자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낯선 남자는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00가 아침부터 이상했어요. 학교에서 봤는데, 무슨 물통 같은 걸 들고 있더라구요. 약수터라도 다녀오는 길이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었어요. 오전 수업에도 안 들어왔어요."
그 남자가 다니는 청대는 우암산 바로 아래 있다. 물 좋은 약수터가 청대 근처에도 두세 군데 있었다. 여자가 시계를 보니, 오후 3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오늘은 체육대회 날이라서, 평소보다 실습 근무가 조금 일찍 끝날 것 같았다.
"그런데 더 이상한 건, 00가 들고 있던 물통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는 거예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00가 나쁜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이 돼서 왔어요. 녀석이 며칠 전부터 말도 없이 시무룩해서, 넋이 나간 놈 같았거든요. 살고싶지 않다는 말도 했어요.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까 무서워요..."
여자는 낯선 남자의 진지하고 선해 보이는 눈빛과 그의 떨리는 음성을 들으며,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내 이름은 어찌 알았는지, 내가 여기 있는 줄은 또 어찌 알았는지, 왜 나를 찾아와서 그 남자의 신상을 걱정하는지, 의심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텐데, 그때 여자는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종 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체육대회가 끝났으니 교실로 들어가 종례 후 귀가하라는 교내 방송이 들렸다. 운동장에 있던 여학생들은 먼지를 풀풀 날리며, 왁자지껄 각자의 교실로 들어갔다. 낯선 남자는 여자가 교실로 들어간 사이, 아이들이 사라진 텅 빈 운동장 벤치에서 여자를 기다렸다.
낯선 남자는 택시 뒷자리에 여자를 태우고, 택시 기사에게 내덕동 성당으로 가자고 했다. 00가 성당엘 다니니까, 아마도 거기로 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는 주장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낯선 남자가 우암교회 장로의 아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심지어 같은 학과 동기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생 사이였다. 수업을 같이 듣는 과친구도 아니고, 자주 어울리지도 않았던 동창생을 그의 자작극 무대에 캐스팅한 건 매우 탁월했다.
수줍은 듯 순진하고 정직해 보이는 동창생의 인상은, 여자를 속이려는 그 남자의 전략에 적합한 배우였다. 그의 연기도 진지하고 뛰어났지만, 일단 여자가 그런 인상에 호의적일 거라는 걸 남자는 귀신같이 알고 있었다.
(2021년 9월 18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