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정중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여자가 가벼운 마음으로 청색 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섰다. 정원 나무들 사이로 검둥이가 달려와 반갑게 뛰어올랐다. 여자는 대문에 달려있는 우편함 바깥으로, 삐죽이 내밀고 있는 우편물들을 집어 들고 수신인을 확인해본다. 보름 전 입대한 남자 친구에게서 그녀에게 편지가 한통 와있었다.
흰색 꽃들이 매달린 배롱나무 옆으로, 어느새 능소화나무도 주황색 꽃을 피우고 있었다. 여자는 정원에 놓여 있는 큰 돌에 앉아 급하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여전히 별 내용은 없었다. 감리교 신학과 학생답게 아직도 목회자 어투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섬세하게 써 내려간 편지에선 예전과는 다른 정성이 잔뜩 묻어있는 느낌이었다.
그 친구를 나에게 소개해준 수진이는 일 년 전쯤 내게 귀띔하듯이 말했었다. 그 친구가 그럴 줄 몰랐는데 음악학과, 미술학과 여학생들을 번갈아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고 했다. 수진이는 그를 향해 바람둥이라는 말까지 적용시켰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그냥 친구였다. 키도 크고 리더십도 있는 그 친구가 썩 괜찮아 보였는지, 수진이는 1학년 여름 무렵에 그 친구를 내게 소개했다. 고3을 지나면서 살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나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 외모 때문에 심하게 위축돼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대학 1학년은 여자로 보이기엔 무언가 부족한 시절이었다. 햇병아리 같은 여학생들이 제 아무리 요란하게 치장을 한들, 섹시한 여자로 보일 리 만무였던 수수한 세상에 우리는 살았었다.
그런 세상에서 그 여자는 저 혼자 고민이 많았었다. 살을 빼서 날씬한 여학생이 되고는 싶었는데, 그만한 대가를 치르지 못했다. 어찌 보면 신앙심과 휴머니즘이 넘쳐서 수녀원 생각을 했던 게 아닐 수도 있다. 연애하자고 덤벼드는 남자가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여자는 신학과 친구를 처음 소개받던 날, 영문과에서 제일 예쁘기로 소문난 친구와 그 자리에 동행했다. 신학과 학생이라면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진 않을 거라고 기대하면서도, 그녀의 자신 없는 외모에 대한 핑곗거리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친구가 예쁜 여자의 외모에 더 호감을 느끼는지 아닌지 궁금했다. 그날 이후, 신학과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게 된 사람은 예쁜 여학생이 아니라 그 여자였다.
그렇게 신학과 친구랑 첫 만남이 있던 날, 어떠한 대화들이 오고 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키 크고 잘 생긴 남자의 외모 속에 명석한 두뇌도 있다는 것이 안심스러운 날이었다.
그 친구는 군입대 전까지 대학 4년 동안, 남부럽지 않게 여자들을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일일이 들은 바는 없지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내게 편지를 보내온 것도 거의 이 년 만이었다. 1학년과 2학년 땐 제법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신앙과 진로에 대한 고민 같은 게 있는 날이면 그는 편지를 보냈었다.
정원 나무 아래 앉아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옛일을 회상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무슨 일 있니? 왜 안 들어오고 거기 있니?"
검둥이가 나보다 먼저 열린 현관문 사이를 비집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어머니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시면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참, 이상하네. 웬 소도둑같이 생긴 놈이 우리 집 앞을 기웃거리더라. 뭐라도 훔쳐가려고 염탐하는 건지 알 수가 없으니... 오전에 그놈을 봤었는데, 아직까지도 우리 동네에서 얼씬거리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다.
다음날 어머니가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들어오셨다.
"아니, 어제 그놈이 우리 집 앞에서 또 얼씬거리더라. 내가 빗자루 들고 쫓아가서 혼을 내고 쫓아버리고 오는 길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알지 못했다. 어머니에게서 빗자루 몰매질을 당할 뻔한 소도둑놈이 그 남자였다는 것을...
(2021년 9월 16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