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책 같은 여자, 만화책 같은 남자 9

by 도라지

남자가 택시를 타고 떠난 자리에서, 여자는 늙은이처럼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길을 따라 걷다가, 저도 모르게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하늘만 또 애꿎게 바라보았다.


집에 돌아온 여자는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그날은 아마도 남자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첫날이었나 보다. 남녀 간에 사랑을 속삭이는 편지도 아니고, 친구 간에 생각과 인생을 나누는 편지도 아니었다.


여자에게 그것은, 미숙한 인간에게 기독교가 말하는 진정한 사랑을 깨우쳐주려는 종교적인 정신의 발로였다. 양치기 목자도 아닌 그녀는, 길 잃은 어린양처럼 천방지축의 그 남자를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남자는 답답한 마음에 성당엘 갔다. 어두컴컴한 성당 안에 혼자 앉아 있는 줄 알았는데, 저쪽에 수녀님이 한 분 앉아 있었다. 그는 이름도 모르는 수녀님에게 다가가 면담을 요청했다. 남자는 처음 보는 수녀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았다.


수녀가 물었다.

"형제님은 그걸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세요?"


남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그럼요."


그러자 수녀가 말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과는 완전히 다른 겁니다. 형제님은 그 자매님을 그저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남자는 고개까지 저으며,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여자를 진짜로 사랑하는 거라고 말했다. 수녀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 남자에게 더 이상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럼, 형제님~우선 천주교에서 세례를 받으셔요. 예비자 교리 공부가 곧 시작될 거예요. 내년 부활절에 첫 영성체 하실 수 있겠네요. 교리 공부를 하게 되면, 지금 제가 드린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남자는 수녀와 약속을 하고, 며칠 후 예비자 교리 공부반에 들어갔다. 남자는 살아오면서 부모로부터 받아야 할 사랑과 교육을 놓친 부분이 많았다. 물론 그의 잘못도, 그의 부모 잘못도 아니었다. 운명은 때로 가난과 불행의 모습으로 찾아오기도 할 뿐이다.

그런데 가난한 시골 촌놈치곤 쓸데없이 자존심만 셌다. 이제껏 자기가 원하는 걸 변변히 얻어본 적 없던 남자는, 인생에서 여자 하나만은 기필코 원하는 여자를 갖고 싶어졌다. 상대 여자 입장은 고려할 바 아니었다. 그가 선택했고, 그는 끝까지 가기로 했다.


시간은 부질없이 흐르고 있었다. 해가 바뀌고 겨울의 끝자락에서 여자는 졸업을 했다. 남자는 기어이 여자의 졸업식에 참석했다. 괴로운 여자의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겨울철 하나뿐인 갈색 마이를 입고 여자 옆에서 사진도 찍었다. 그리스 석고상처럼 생긴 심리학과 남자 친구와, 화사한 꽃처럼 웃고 있는 불문과 여자 친구 옆에서, 남자는 멋쩍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여자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알바를 했다. 이년 전 제대한 그 남자는 지금 4학년이 되었다. 4학년 1학기 중간에 부활절을 일주일 앞두고, 그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 성인의 이름을 따라, 요한보스코라는 세례명도 여자가 지어주었다.


대부는 그의 친구가 서주었다. 그가 우암교회와 내덕동 성당을 양다리 걸치며 다닐 적에, 성당을 접하게 해 준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남자의 대부가 되고 나서 한 달 후에, 예수회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십 년 후엔 예수회 수사 신부가 되어, 평화방송에서 매주 강의도 했다.


과연 신부가 된 그 남자의 대부님은 남자의 세례식날, 대자를 위해 무슨 기도를 했었을까? 본인은 홀연히 수도회로 떠나갈 준비를 하면서, 대자가 세례 기념 사진 속 여자와 결혼해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기를 바랬던 것일까?


(2021년 9월 20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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