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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Sep 09. 2022

(소설) 아담과 애플 28

와우산 자락 아래에 터를 잡고 있는 청진고등학교의 넓은 운동장은 청진 대학교와 맞붙어 있다. 바람은 이따금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비밀스럽게 거기를 오고 가기도 하였다. 소리도 없이 조용히 오고 가는 것은 바람뿐만이 아니었다. 시간도 그러하였고 성훈도 그러하였다.


신재희가 말루스 창가에 혼자 앉아 있는 은정을 발견하고는, 그녀의 뾰족한 구두굽 소리의 볼륨을 한 단계 낮추며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은정씨, 누군가 오실 분이 안 계시면 내가 좀 앉아도 될까요?"

"네~"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어요? 은정씨가 혼자서 말루스에 앉아 있는 걸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인 거 같아서요."


눈치가 빠른 신재희는 이은정의 애타는 마음을 벌써 읽어버렸지만, 짐짓 점잖을 떨며 은근하게 말을 이어갔다.


"사랑이란 거에 대해서 우리가 어릴 때 배웠던 건 하나도 쓸모가 없어요. 영혼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거라는 둥, 조건 없이 대등한 관계에서의 교제라는 둥 그런 말들 말이에요. 우리가 꼬맹이일 때 주고받던 반쪽 목걸이처럼 사랑은 반으로 정확하게 나뉜 그런 사람끼리 만나는 게 아니더라고요.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포함되는 거예요, 일종의 굴종이라고나 할까요? 누군가 한 명은 반드시 상대에게 굴종을 해야지 그 관계가 이어져요. 필요에 의해서든 스스로 원해서든 어느 한쪽은 상대에게 굴복해야 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굴복한 건지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거든요. 다 내 경험에서 하는 말이니까, 언니 말 새겨들어서 손해 볼 거 없을 거예요."


신재희의 화장기가 짙은 수려한 이목구비가 오늘따라 유달리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언니'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 약간 겸연쩍었는지 혼자 헛웃음을 지어 보이는 신재희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지혜로운 스승의 면모가 스쳐 지나갔다.


은정은 누군가에게 이런 조언을 듣고 싶었던 것도 같다. 사랑은 대등한 반쪽 찾기가 아니라 포함 관계이기에 한쪽이 굴종해야 한다는 표현은, 신재희의 삶의 태도를 대변하는 것과 같았다. 그 표현이야말로 '사랑'이라는 감정이 갖는 특징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은정은 스스로 반문해보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자발적으로 그에게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은정은 주성훈에게 끝도 없이 복종하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불쑥 서운한 마음이 튀어나오기도 하였다. 주성훈으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의 고백조차 받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은정의 머리가 갑자기 나빠지고 있는 것도 아닌데, 성훈과의 기억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질 않는다. 자꾸만 은정의 감정이란 것이 덧칠해져서, 본래의 기억을 훼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남자와 두 번의 짧은 키스를 나누었던 것으로, 남자가 그 여자만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지도 모른다. 은정의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성훈과의 두 번째 키스 이후였던 것 같다. 키스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사람마다 각기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호감과 욕정의 아슬아슬한 경계가 지니는 미묘한 감정 선상에서 키스의 의식이 성립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예전엔 성훈이 가지고 있는 모든 권력과 자본과 능력들을 흠모하고 높이 우러러보기만 했었다. 성훈은 은정이 닿을 수 없는 불가침의 세계에 속한 존재여서, 은정의 욕망과 근심에 추가되는 존재가 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은정의 근심은 온통 성훈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었다.


사랑을 시작한 여자가 근심이 많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 누구의 잘못을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원인을 밝히고 해답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랑이 지닌 속성이 그러할 수도 있겠지만, 은정은 난생처음 느껴보는 사랑의 근심에 대해서 확실하게 답을 알고 싶어졌다.


나의 생각 속에 스승이 있고 해답이 있다는 것을 은정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주성훈을 사랑한다. 그도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은정은 그것부터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복종도 근거가 있어야만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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