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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ug 16. 2023

타인의 오두막 2

내가 여기로 내려오기 전, 지혜는 내게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모, 태풍이 오고 있는데 지금 거기를 가겠다는 거야? 그 아저씬 아니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결국 못 헤어졌군. 벌써 팔 년이야, 이모. 돌아올 땐 꽃반지라도 하나 끼고 있어야 해~"


지혜의 냉소적인 언어 속에는 나를 향한 걱정과 근심이 잔뜩 묻어있었다. 지혜는 십오 년 전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되었다. 큰언니와 형부의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지혜는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누워있었다. 지혜가 퇴원해서 병원문을 나서는 날부터 우리는 한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나는 그즈음 이년 간의 결혼 생활을 마치고 혼자 지내고 있을 때였다.

 

"각자의 연애에는 절대 간섭하지 않기로 한 거 또 잊은 거야? 수시로 약속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니가 문제인 걸까, 아니면 바보처럼 아직도 그 남자에게 사로잡혀 있는 내가 문제인 걸까? 우리 이 주제로 각자 소논문이나 써 보는 건 어때요, 작가님~ 뭘 내기로 걸어야 하나? 피부과 이용권 좋겠다~ 흐흐흐"


"내기~ 좋아. '진짜 똑똑한 여자는 사랑에서만큼은 바보가 된다'는 나의 가설에 대해, 비트겐슈타인이라면 어떻게 증명을 했을까? 자기가 뭘 손해 보고 뭘 잃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르는 여자, 그게 딱 조연우씨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무언가 부당한 일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아채기라도 할 때면, 지혜의 아름다운 입술은 오른쪽으로 살짝 쏠리곤 하였다. 나는 지혜에게 다가가 그녀의 작지만 단단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혜의 따뜻하고 강인한 눈빛은 얼마간 내게 위로를 주었다.


지혜는 나와 같은 대학교를 졸업했다. 우리는 같은 대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의 정서를 자랑스럽게 여겼는데, 내가 가끔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마다 지혜는 두 팔을 높이 올려 허공을 향해 크게 휘저으며 민족의 아리아를 부르곤 했다. 지혜가 부르는 민족의 아리아를 들을 때마다, 내 가슴에 안개처럼 드리워져있던 상념들이 대기권 밖으로 사라져 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지혜가 부르는 민족의 아리아를 듣다가 내가 '민족의 힘으로'를 '존재의 힘으로'로 바꾸어 부른 날부터, 민족의 아리아는 우리 둘만의 '존재의 아리아'가 되어버렸다. '사랑'이라는 이름 말고도 자유, 정의, 진리, 이런 이름들이 아직도 우리 가슴에 뜨겁게 살아 넘실거리는 것을 느낄 때마다, 지혜와 나의 하루는 충분히 가치 있고 행복한 삶으로 금세 물들어졌다.  


"타오르는 자유, 나아가는 정의, 솟구치는 진리, 존재의 힘으로~ 이모 조심히 다녀올게~"


지혜는 그녀의 아빠처럼 국문과 교수가 되기를 희망했으나, 휠체어를 탄 여자가 교수가 된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느덧 서른 살이 되어버린 지혜는 열다섯 살에 겪었던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어 생활하고 있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지혜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작은 캐리어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팔 년 전 준영과 처음 만났던 날 그와 나누었던 대화의 내용들은 잘 기억나지가 않는다, 그런데도 그날 우리가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며 보낸 다섯 시간과 그다음 장소에서의 느낌은 아직도 고스란히 내 온몸에 새겨져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홀려서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하는 단계에 도달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는 건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준영은 그날 무언가에 고무되어 '비트'와 '타인'의 암호를 제안했었지만, 우리는 첫 섹스를 나누고 난 뒤 그렇게 자주 만나지 못했다. 준영은 '심리적 미혼 상태'의 기혼자였다. 몇 년 동안 섹스를 나누었던 첫사랑이 자본의 계산법을 따라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기 위해 그를 버리고 떠나간 뒤, 준영은 세상의 모든 여자들에 대한 불신과 혐오로 방황했었다. 그 와중에도 젊은 청년의 몸은 섹스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찼을 것이고, 오직 섹스만을 위해 덤벼드는 여자들에게 다시 또 환멸을 느끼는 이중적 괴리 속에서 그의 인식의 패러다임은 점점 더 망가져갔을지도 모른다.


그를 버리고 떠나간 첫사랑 여자에게 복수라도 하듯이 그는 마침내 변호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여느 부모처럼 그의 부모님도 준영에게 결혼이 인생의 목표인양 압박을 했을 것이고, 결국 섹스놀이가 아니라 진짜 사랑 한번 해보지 못한 준영은 "세상의 모든 여자는 다 똑같이 속물이다"는 명제를 등불 삼아 지인으로부터 적당한 여자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키가 크지도 않았고 얼굴이 이쁘지도 않았는데 몸매마저 볼품이 없었다. 어차피 속물 같은 여자들이 그의 자격증을 보고 덤벼들 봐에야, 차라리 다른 남자의 눈길 한번 변변히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저 여자는 적어도 그를 배신하고 떠날 것 같지는 않았다.


준영은 '사랑이라는 것'에 대해서만큼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원하는 것을 위해 무엇을 수행해야 하는지 아는 바가 없었다. 단지 착실해 보이는 것 외에 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와 두세 번 만나 술을 마시다가 그는 만취 상태에서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그 한 번의 실수로 임신한 여자를 그는 차마 떠날 수가 없어서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술과 섹스'의 저주라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그가 디오니소스와 아프로디테를 원망하는 것은 그리 정당해 보이지가 않았다.


첫사랑이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는 건, 그 나이 무렵엔 섹스에 대한 욕망과 사랑에 대한 욕망을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섹스는 욕망의 분출구로서가 아니라 서로의 몸에 내 정기를 불어넣는 예식이라는 걸 이해하는 나이는 조금 뒤에 온다는 것을 청년들은 알지 못한다.


그 당시 사회가 부여한 '도덕심'이라는 신기루에 사로잡혀 성장했던 그가 꿈꿔왔던 "단란한 가정"의 환상은, 섹스를 나눈 여자와 결혼을 해야 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걸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은 여자와 사랑을 함으로써 완성되어야만 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욕망을 도덕심으로 포장하여 자신을 너무 높이 추켜세운 나머지,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 추락하고 만 셈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했던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너무나도 가혹했다. 어차피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똑같은 속물일 거라고 생각했던 준영 앞에, '세상에 이런 여자도 있구나' 싶은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푸른 잔디밭과 숲 속의 나무들 위로 거세게 빗줄기가 쏟아져내렸다. 나는 빗줄기가 들이치는 창가에 기대어 '타인의 오두막'을 향해 걸어오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오직 나를 향한 기대로만 가득 찬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욕망이라는 날개를 달고 황금빛의 도덕률에 다가가다가 추락하였다 할지라도, 그 모든 약점과 거짓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준영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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