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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ug 23. 2023

타인의 오두막 3

바짓단이 흠뻑 젖은 채로 들어서는 준영에게 나는 미리 꺼내놓은 타월을 내밀었다. 그와 나 사이엔 여전히 타월 한 장만큼의 거리가 늘 존재하는 것도 같았다. 그의 젖은 옷을 아무렇지 않게 닦아줄 수 있을 만큼 준영의 신체가 편안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는  문득 놀랍게 생각되었다.


이렇게 매번 어색하기도 한 우리가 어쩌다 '비트(남자)'와 '타인(여자)' 사이가 될 수 있었을까. 우리의 첫날을 생각할 때마다 의문이 드는 대목이었다. 나도 준영도 이성에게 먼저 다가가서 유혹하는 인물들은 못되었다. 그렇다고 우리의 첫 만남과 이끌림을 오직 그놈의 "술"탓으로만 치환하기는 더 싫었다.


그날 우리는 태풍으로 인해 만났지만, 태풍이 우리를 '사랑의 환상'으로 데려간 것인지 술이 우리를 '쾌락의 정점'으로 데려간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채로 우리는 하룻밤을 보냈다. 어쩌면 우리는 태풍의 눈 속에 있었던 것인지도, 아니면 그 반대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연우씨, 여기 어때요? 당신만을 위한 오두막인데, 마음에 들어요?"


그가 모처럼 나를 향해 밝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사방에 아무도 없을 때만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는 편안한 미소였다.


"와아~ 너무 좋아요. 아주 오래전부터 나만의 오두막을 갖고 싶었는데, 친구 덕분에 이런 호강을 다 하네요~"


준영은 내가 던져놓은 '친구'라는 언어의 그물에 걸려드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려는 듯이, 내 손목을 잡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층계로 이끌었다. 그가 내 손목을 잡은 것도 얼마만의 일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가정이 있다는 이유로 그는 언제나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처럼 늘 주저하며 조심스러워한 탓에, 우리는 연인들이 가질 법한 추억들조차 함께 만들 수가 없었다. 나는 준영을 남자로서 사랑하는데, 그는 나를 여자로서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적지 않았다. 


"언제든 연우씨가 오고 싶을 때 와서 지내요. 여기 타인의 오두막뿐만 아니라, 저 앞에 비트의 오두막에도 다른 사람은 오지 않을 거예요. 당신에게 내가 친구밖에 될 수 없다는 게 늘 미안했어요.."


그래, 지금 같은 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준영의 눈동자 때문에, 나는 사랑인지 우정인지 정의 내릴 수 없도록 만드는 이 남자와 팔 년이라는 시간을 세월의 강에 흘려보냈는 지도 모른다. 지혜는 그런 우리의 수상한 관계에 대해 극단적으로 명쾌하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섹스리스 부부는 있을 수 있지만, 섹스리스 연인은 있을 수 없다"라고. 고로 준영과 나는 연인 사이가 아니라고 했다.


내가 준영을 남자로서 느끼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욕망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는 나를 여성으로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혜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나는 그건 준영의 도덕심 때문일 거라고 둘러대었지만, 지혜는 오묘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준영을 알고 지내는 동안 나는 다른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준영이 언젠가 아내와 이혼을 하고 내게로 올 거라고 오롯이 기대하는 마음 때문만도 아니었다. 지혜의 분석처럼 도덕심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준영이 술에 의지하여 가끔 그의 욕망을 봉인해제하는 대상이 그저 ''수도 있다는 해석에도 나는 이미 동의하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내가 그에게 안심할 수 있는 여자 그 이상의 의미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견우가 직녀를 만나기 위해 일 년에 한 번 오작교를 건너는 그 공중 도보 비행을 한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준영을 만난 이후로, 사랑의 감정을 느껴야만 열리는 나의 신체는 오직 준영에게서만 여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준영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아름다운 내 육체의 시간들을 허무하게 날려 보낼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어느 날 나뭇잎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풍처럼 불기 시작했다. 나는 준영을 생각하며 혼자만의 쾌락을 은밀하게 수행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나의 어려움을 한 번도 그에게 말하지 못했다.


지혜의 방에선 일주일에 한 번씩 커다란 재즈 음악의 선율과 뒤섞여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곤 했다. 가끔은 고음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도 했는데, 이튿날이면 지혜의 얼굴은 화사한 복숭아빛으로 건강하게 반짝였다. 지혜는 그 소리가 듣기 싫으면 이모가 호텔방에서 자고 오라고 내게 카드를 쥐어주며 능글맞게 웃을 때도 있었다.


"장애인이 호텔방 드나드는 것보다, 사지육신 멀쩡한 이모가 호텔방 가는 게 모양이 좋겠지? 후훗~"


지혜의 논리가 맞는 것도 같아서, 지혜의 남자 친구가 집으로 오는 날이면 나는 적당한 동네 호텔을 찾아 집을 나섰다. 그리고 이름뿐인 호텔 방 침대의 하얀 시트 위에서, 나는 준영을 그리워하며 홀로 내 욕망을 그려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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