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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Aug 31. 2023

타인의 오두막 4

오두막의 다락방은 아래층보다 한층 아늑하고 사랑스러웠다. 크지 않은 침대가 벽면과 나란히 붙어있었는데, 베개가 놓여있는 머리맡에서 아침에 눈을 뜰 때면 아치형으로 낸 창문으로 바깥 풍경이 곧장 바라다보이도록 설계된 였다. 그 옆으로 작은 나무 의자와 책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가 나를 떠올리며 공간을 배치하였을 거라고 상상하는 것은 내게 큰 위로와 기쁨을 주었다. 무수한 시간들 속에서 그의 머릿속에 온전히 나로 가득 찬 시간은 얼마나 될까 나는 늘 궁금했었다.  사람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떠오를 때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사람으로만 가득 채워지는 순간이 있다면, 비로소 사랑은 거기에서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다. 다른 신체와 정신을 지닌 두 사람이 서로의 눈빛으로 사랑을 확인하는 완벽한 순간은 그다음에 올 것이 분명하였다. 


다락방의 작은 창문으로 태풍을 실어 나르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준영이 내 뒤에서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사랑해요~"


그의 낮게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소리처럼 귓가를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다락방의 공간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사랑의 고지가 존재한다면, 나는 이미 그 고지에 서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준영은 나를 만나는 팔 년 동안 시지프스 신화 속의 주인공처럼, (그에겐 '불륜'에 해당되는 것과 동일어인) '사랑'이라는 바위를 산 정상으로 밀어 올리다가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영원한 노동의 형벌을 받아야만 하는 신세로 스스로 전락하곤 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의 고지에 이미 내가 혼자 있었다한들, 그것은 무의미한 고지 점령에 불과했다.


한 번이라도 입 밖으로 내뱉을 시엔 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준영은 그 말을 무척 비밀스럽게 금기시까지 하였다.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확실한 그 무엇'을 좇아야만 하는 시간의 터널은 그래서 늘 지루하고 불안할 때도 많았다. 이제껏 나는 '확실한 그 무엇'을 사랑 고백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던 듯싶다. 순간적으로 내 입에서도 음률을 따라 읊조리듯이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렇다고 그의 사랑 고백 한 마디에, 마침내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보짓일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두 개의 오두막을 지어놓고 그중에 한 개는 '나의 것' 그리고 나머지 한 개는 '그의 것'이라고 표시해 둔 것부터 그의 사랑법을 의심해보아야 하는 지점이었다. 어쩌면 두 개의 오두막은 '나는 영원히 그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는 표식일 수도 있지 않은가.


아~,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은 순간적으로 휘몰아치는 태풍과도 같은 육체의 들뜬 욕망을 결코 이길 수가 없는 법이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의 눈빛과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당신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너무 쉽게 당신을 사랑해서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는 벌을 받았던가 봐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인생의 확실성이 그의 사랑 고백 한마디와 그다음에 이어지는 육체의 향연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만 같았다. 인생의 비밀스러운 책에 쓰여있던 온갖 난해한 문자들의 기호가 드디어 하나의 문장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언어와 눈빛과 육체의 삼위일체야말로 사랑의 고지를 진정으로 정복하는 길이라고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푸른 바다를 처음 만난 소년처럼 환희에 사로잡힌 표정을 지으며 내 몸을 집어삼키었다. 더 이상 우리에게는 그 어떤 언어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겐 도덕심을 마비시켜야만 하는 술도 필요하지 않았다. 태풍은 강렬하게 몰아쳤고, 우리의 육체는 더욱 거칠게 서로를 가로질렀다. '타인의 오두막'에서의 첫날이었다. 온종일 형형색색의 잿빛으로 채색되었던 하루가 신비스러운 흥분으로 더욱 어둡게 저물고 있었다.


잠을 자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준영이 '비트의 오두막'에서 요리를 하는 동안, 나는 빗소리를 들으며 와인을 먼저 즐겼다. 어두컴컴한 바깥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태풍처럼, 주방에 서 있는 준영의 등에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도덕심이 다시 무겁게 얹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오두막 안에 켜 있는 조용한 불빛들이 소란스럽지 않게 낭만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쓸쓸하게 여겨졌다.  


"비트~ 도덕심을 뛰어넘는 게 사랑 아닐까요? 도덕심이란 것도 사회마다 다르잖아요. 이슬람 문화권 사람이라면, 지금 당신이 나를 방치하고 있는 게 비도덕적인 거예요. 가련한 여자를 팔 년 동안이나 홀로 내버려 두다니요~ 후훗"


나는 "가련한 여자"라는 대목에서 상당히 구슬픈 어조를 섞어가며 준영에게 장난 걸듯이 말했다.


"당신은 영원히 '가련한 여자'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은 걸요~ 하하하"

 

그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렇겠죠? 내가 어디를 보나 '가련상'은 아니죠~ 점점 더 힘이 쎄지고 있는 것도 같아요. 흐흐흐"


저녁 아홉 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비트의 오두막 밖에 서있는 키 작은 가로등 불빛들 사이로 비바람이 잦아들 무렵에, 우리는 처음으로 가족처럼 한 집에서 밥을 먹었다. 소소한 일상이 주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누구의 방해도 없이 누려보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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