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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Sep 01. 2023

타인의 오두막 5

늦은 저녁을 마치고 우리는 남은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들었다. 식사할 때 잠시 떨어져 있던 두 신체가 다시 안락한 소파 위에서 붙어 앉았다. 두 개의 어깨가 나란히 붙어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내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준영은 와인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무언가 생각난 듯이 내게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연우씨, 언제까지 노총에서 일할 거예요?"


나는 급작스러운 그의 질문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제 준영이 "타인의 오두막" 주소를 문자로 전송해 왔을 때도 적잖이 당황스러웠지만 이 질문보다 당황스럽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가 나의 신념에 태클을 걸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의 느닷없는 물음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노총(노동조합총연맹)에서 근무한다고 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붉은 띠를 두른 혁명가"쯤으로 나를 바라보곤 하였다. 철학 박사 공부까지 마친 여자가 구태여 노총에서 근무할 이유가 있는 것일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인류사적으로 볼 때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에 영향을 끼치는 상관관계는 늘 자명하였듯이, 나는 노동자들의 지성이 향상될수록 그들의 행복 지수 또한 상승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불과 두 시간 전만 해도 우리는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며 뜨거운 몽상에 젖어있었는데, 이제는 서로의 신념을 조심스럽게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올바른 섹스는 언제나 일체의 다른 탐욕을 배제한다. 세상을 지배하는 다른 정신 작용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세상은 단지 육체의 환희 속에서만 존재할 것만 같은 절정에 이르게 되면, 삶과 죽음의 비밀은 일순간에 사라지고 나는 무(無)의 존개가 되곤 하였다.  


하지만 그 일각의 깨달음은 그대로 멈추어있지 않는다. 하나로 합쳐진 서로의 신체가 다시 두 개의 신체로 분리되어 침대 위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고대로부터 세습된 탐욕스러운 세상처럼 내 머릿 속도 조금씩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준영씨는 내가 노총에서 일하는 게 싫은 건가요?"


한순간 어떤 구절이 그의 입가에 막 떠오르려고 하다가 이내 벙어리의 입술처럼 그의 말문을 닫아버렸다. 나는 질문을 바꾸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당신도 노동자이잖아요. 법을 읽고 서류를 만들어서 변론하는 노동요. 당신이 조금 더 지성적인 활동 영역에서 노동을 한다고 해서 당신이 노동자가 아니라고 말할 순 없는 것처럼,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우리 모두 다 노동자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당신은 내가 어떤 노동을 하며 살기를 바라는 건데요? 어여쁜 꽃집이라도 하나 열까요?"


그는 나의 갑작스러운 대안을 매우 반기듯이 포착하면서 불쑥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꽃집~ 그거 좋네요. 하하~ 연우씨의 가치관 잘 알아요. 그리고 존경해요. 하지만 난 연우씨가 정당하게 대접받으며 살기를 원해요. 노총도 변질된 부분들이 너무 많잖아요. 권력의 하수인에 불과해진 느낌이랄까요? 음모와 술수가 난동하는 정치판과 다를 바가 없어요. 당신의 순수한 열정이 그런 곳에서 아무 힘이 없거 같아서 그게 싫은 것뿐이에요."


"민들레가 피지 않는 봄은 없어요. 겨울이 가고 봄이 올 때마다 민들레는 반드시 꼭 피어나야만 해요~ 준영씨가 내 인생에 처음으로 개입하는 말을 하는 거 같아서 난 오히려 기분이 좋은 걸요. 사랑받고 있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거 나 혼자만의 몹쓸 착각인 걸까요? 흐흐흐~"


나는 유쾌한 웃음을 지으며 준영의 진지한 눈빛을 향하여 사랑스럽게 대꾸했다. 하지만 무언가 내 마음속에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이 느껴졌다. 종교도 사랑도 도덕심도 신념에 불과하며, 모든 것은 '인식 속의 작용'일뿐이다. 


나는 그의 도덕심을 존중하여 친구인지 연인인지 알 수 없는 관계에 머물면서 그의 처분대로 팔 년을 지냈는데, 그는 지금 나의 삶을 가로지르는 막중신념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준영이 내게 던질 그다음 말들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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