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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Sep 19. 2023

타인의 오두막 6

식탁 위의 조명등 아래 번지는 그의 얼굴은 잘 지어진 학교의 도서관과도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기엔 뭐랄까, 일련의 조직화된 전통의 흐름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 듯한 갑갑함이 배어 있기도 하였다.


그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성곽과 바깥을 철저하게 구분 짓고 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하였다. 정체가 불분명한 이기심과 타인들의 시선에 흔들리는 연약한 도덕심과 명예로움이 그의 성 안을 가득 우고 있는 것도 같았다.


"연우씨는 가끔 현실감이 떨어진다고나 할까요? 당신은 충분히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더 많이 누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험난한 가시밭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나는 연우씨가 자신에게 조금 더 어울리는 삶을 살기를 바래요."


준영의 지적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삶이기도 하였으니 그렇게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린다는 것의 의미가 내게는 조금 달랐을 뿐인데, 준영과 나의 인식 체계가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였나 보다.


한편으론 그런 나의 다름 때문에 준영과의 이런 기이한 사랑의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데, 그는 우리 두 사람의 관계에서만큼은 그의 잣대를 다르게 적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날 밤 적당히 술을 마시고, 각자의 오두막으로 돌아가서 잠을 잤다. 그 사람만이 아는 내 이름을 붙인 오두막에서, 나의 영토를 차지하고 지키려는 이주민의 갈망 따위는 발현되지 못했다. 준영이 말하는 '내게 어울리는 삶'이 무엇일까 그것을 떠올리느라, 나의 생각의 방향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두막 안에서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러다 결국엔 내가 여전히 그에게 진짜 '타인(他人)'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만이 태풍처럼 휘몰아칠 뿐이었다.  


도시로 돌아온 나의 일상은 다시금 바빠졌다. 열여섯 개의 노동조합 지역 본부를 탐방하면서 각 지역별 현안을 직접 파악하고 자료 수집을 통해 정책으로 발전시키는 일은 꽤 고단한 행군이었다.


하지만 고단한 행군 중에도 지역본부 및 산별연맹 상근활동가들과 유대하는 어떤 동질감에서 나는 제법 충분한 힘을 얻기도 하였다. 그것은 준영과의 섹스를 통해서 영원의 신비로움을 체험할 때 도달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결속이었다. 아주 오래전 인류가 존재했을 때부터 그랬듯이,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아름다워지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노총 행군의 마지막 여정은 제주도였다. 비행기가 제주공항에 도착할 때쯤 내리던 비가 멈추고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제주지역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활동가가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는 작지 않은 키에 단단한 체구를 가진 훤칠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구릿빛으로 보기 좋게 그을린 그의 피부에선 제주섬의 태양과 바닷바람이 건네는 생명의 기운이 물씬 풍겨 나왔다. 마치 신전(神殿) 건설사의 후예인 듯, 혹은 신전 앞마당에 세워놓은 조각상인 듯이 보이기도 하는 그의 외형은 함부로 빚어질 수 없는 엄숙함마저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짧게 소개한 그가 나를 공항 앞에 세워두고 잠시 후 나타났을 때, 그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오토바이 한 대를 타고 왔다. 그가 건넨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자 덜덜거리는 오토바이의 소음이 약간 거슬리기도 했지만,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의 맛은 새로운 청량함의 극치였다. 벌판을 달리는 한 마리 들짐승처럼 자유롭게 바람을 가르며 제주지부에 도착할 무렵, 저만치서 어슬렁거리고 있는 제주 지부장 선배의 구부정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선배, 나 왔소~"

"하이고, 요놈의 기지배, 잘 생긴 놈 뒤에 타고 오니까 그새 더 이뻐졌구나~"

"언니는 여전히 구부정하시구려~하하하.. 지난주에 보내주신 논문은 단숨에 잘 읽었소. 글빨이 진짜 환상이더만. 그게 다 환경 탓인가 보오. 선배의 두뇌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묵직한 아름다움이 논문에 있더라 그 말입니다."


선배는 내 짓궂은 칭찬을 듣다 말고 갑자기 몸을 돌려 그녀가 '최선생'이라 부르는 남자에게 유쾌하게 말을 던졌다.


"흐흐흐, 내가 그랬지, 최선생? <이쁜 년이 똑똑하다>의 표본이 이 여성이라네~"


제주 지부장으로 있는 조연실은 나와 대학 시절부터 각별한 사이였다. 어쩌다 같은 성씨에 이름까지 비슷하여 사람들은 우리를 친자매로 오해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조연실, 조연우~ 그녀와 나는 피를 나눈 자매보다 더욱 끈끈하고 진하게 맺어져 있는 그 무언가를 영혼에 새겨 넣고 산지 오래되었다. 지구상에서 만난 인간 가운데 가장 감탄스러운 인간이 내게는 바로 조연실이었다.


연실은 나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노총 지부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은 <노동자의 책방>이라는 안내 표지였다. 연실은 사무실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최선생이라 불리는 남자도 뒤에서 우리를 따랐다.


동네 작은 도서관 정도의 규모를 갖춘 노동자의 책방 유리창 너머로 한참 멀리 바다가 바라다 보였다. 그 푸른 바다에 시선이 닿기까지는 장거리 뛰기를 하듯이 건물들을 몇 개 지나쳐야만 했다. 연실이 가뜩이나 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매우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집의 다른 쪽에선 보이지 않던 바다가 여기에서만 아주 잘 보인다~ 노동자들에게 '진짜 휴식'을 주고 싶은 나의 염원이 담긴 곳이지. 아, 참.. 자네들 서로 소개는 했나? 여기는 조연우, 내 영혼의 쌍둥이, 우리는 친자매는 아니라네, 본부에서 왔으니까 하는 일 소개는 필요 없을 테고. 그리고 이쪽은 최 진, 아름다운 노동자를 꿈꾸는 실천주의자, 미국 변호사야. 일 년 동안만 우리 집에서 또 다른 노동을 익히고 있는 중이지."  


조연실은 노총을 '우리 집'이라고 표현했다. 연실이 소개한 최진의 직업이 미국 변호사라는 말에 준영의 얼굴이 겹쳐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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