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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15. 2023

늦가을 나들이

그날 높고 푸른 하늘에 구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터미널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빠 부부의 차를 타고 한강 옆을 지나기도 했건만, 그날의 바깥 풍경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은 것은 아마도 내가 어머니에게 온통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던 탓일 게다. 11월 순임에도 불구하고 꽤 날씨가 추웠던 그날, 어머니와 둘이서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엘 갔다. 경기도만 해도 겨우겨우 운전을 해서 모시고 가련만,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일은 영 엄두가 나질 않는다.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기 시작하면서, 내 가방은 우리 집 아이들 갓난쟁이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도로 커져버렸다. 어머니가 한창 기력이 없던 지난겨울에는 차만 타면 연거푸 토를 했었다. 나는 가방에 성인용 기저귀와 비닐봉지, 그리고 손수건과 휴지와 물과 컵 등을 항상 갖고 다닌다.


이모와 이모부는 한날한시에 같은 요양원에 입소하였다. 치매가 있는 부모를 더 이상 돌보기 어려웠던 자녀들은 마침내 시설 좋고 믿음직한 요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에서 판정한 요양등급으로 조금 더 저렴한 시설을 알아볼 수도 있었겠지만, 자녀들은 나라가 주는 혜택을 기하고 비로 월 500만 원의 요양비를 사 년째 부담하고 있는 중이다.


노부부는 나란히 35년생 동갑이다. 머리에 분홍색 니트 모자를 쓴 이모가 요양원 직원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지하 1층 세미나실로 내려왔다. 이모는 세미나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을 보고 처음엔 어리둥절해하는 눈치였으나, 이내 며느리가 싸 온 키위를 틀니가 없는 잇몸으로 맛있게 드셨다.


육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같은 호적에 올라가 있는 늙은 아내를 남인 듯이 바라보는 이모부의 머리는 단정하게 빗질이 되어 있었다. 똑같이 휠체어에 앉아 있어도 이모부가 여전히 멋진 노신사로 보였던 것은, 어쩌면 간병인이 제대로 끼워 넣은 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두 분이 함께 오게 되면서 일인당 월 270만 원에서 20만 원씩 할인을 받아, 두 분의 요양비 총액으로 매달 오백만 원이 지출된다고 이모의 둘째 아들이 설명해 주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친척들과 달리 이종 사촌 오빠의 설명에 가장 귀를 기울인 것은 오빠와 나였던 것 같다. 늙은 부모님의 남은 인생의 시간을 계획하고 그분들의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피해 갈 수 없는 일이지 않은가.


아버지가 대장암 수술을 받고 난 뒤 오빠와 내 마음에는 약간의 조급함이 생겨났다. 언제 불현듯 부모님의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쫓기어, 부모님 거동이 조금 수월해지면 부모님 모시고 함께 여행을 떠나자고 했었다. 하지만 늙은 부모님은 산천 구경을 다니기보다는 살아있는 형제자매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하셨다.


그렇게 시작된 가족 나들이는 이번엔 서울의 동쪽 끝 어느 한적한 동네에 있는 요양원이었다. 어머니의 형제들 가운데 가장 어린 막내이모조차 병환으로 몇 년간 집 밖 출입을 못하다가 이제는 그나마 외출이 가능해졌다. 돌아가신 외삼촌을 대신하여 지난해 갑상선암 수술을 받은 외숙모가 지하철을 세 번 갈아타고 두 시간이나 걸려서 강동에 왔다. 한꺼번에 열명이 면회 신청을 하는 바람에 요양원 쪽에선 지하 1층에 있는 세미나실을 통째로 빌려주었다.  


코로나로 못 본 사이 모두가 더 늙었고 모두가 더 쓸쓸한 표정들이었다. 누군가 생의 의미와 이유 같은 것을 묻는다면, 여기에선 그런 질문조차 호사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살아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인생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되는 것 같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이모와 이모부는 육십 년을 넘게 같이 산 부부지만,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가끔 알아보고 대부분 잊고 지낸다. 그곳에 모인 가족들의 얼굴을 한 순간 알아차리는가 싶다가도, 시시각각으로 다른 이름을 가진 다른 얼굴로 보이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한없이 선량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치매의 병증조차 유순하고 여전히 고운 미소를 지을 줄 알았다.


어머니는 동생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언니의 손을 붙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니가 아가씨적에 잘 부르던 노래 있잖소~ 죽장에 삿갓 쓰고 방랑 삼천리~"


그러자 이모와 이모부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노랫말을 빼놓지 않고 다 기억해서 따라 불렀다. 발동이 걸린 어머니는 내친김에 "섬마을 선생님"까지 큰 소리로 선창하였다. 그들이 꽃다웠던 젊은 시절에 함께 불렀던 노래가 어느새 구십에 다가선 백발노인들의 입에서 구슬프게 흘러나왔다. 험난하고 고통스러운 인생을 살아오신 어머니는 켜켜이 쌓여있던 한을 풀어놓기라도 하려는 듯이 목청껏 소리 높여 노래를 불렀다. 어머니의 한이 서린 억센 노랫소리가 내 귀엔 그저 가엾게 들리기만 하였다.


매주 수요일마다 밖에 나가서 소고기를 드신 어머니는 몇 달 사이에 살이 많이 쪘다. 작년에 새로 산 옷들이 다 작아져서 어머니는 바지와 외투를 새로 장만하셔야만 했다. 며칠 전 어머니의 외투를 사려다가 고르지 못하고 돌아온 나는, 내가 가진 외투 중에 가장 비싼 점퍼를 어머니께 입혀드렸다. 평생 그런 옷 한 벌 입어보지 못한 어머니가 딸자식이 입던 옷이어도 반기며 입으시고 막내딸을 따라 서울에 다녀왔다.


그날 어머니는 등이 휘어지고 흔들리는 걸음으로 딸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게 고속버스를 타고 내렸다. 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꽃피는 봄이 올 때쯤 다시 만나자고, 노인들이 긴 세월의 강 같은 미소들을 지으며 넌지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내년 봄에는 그날 어머니가 집에 혼자 두고 온 우리 아버지도 함께 데려오겠노라고, 어머니는 당신 형제들과 조카들 앞에서 허풍처럼 큰소리를 치고 내려왔다.


서울에 오기 며칠 전 "혼자 집에 계시면 심심하신데 아버지도 같이 가요~"라고 제안하는 막내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머니는 "안 돼~"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었다. 아버지 없는 자리에서 어머니도 한 번쯤 대장 노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도 아니면 늙은 남편을 집에 혼자 떼어놓고서, 남편의 기를 납작하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일까. 늙었어도 부부의 세계는 참으로 오묘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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