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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20. 2023

타인의 오두막(최종회)

제주에서의 짧은 날들을 뒤로하고 나는 서울 본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다시 제주로 내려왔다. 본부는 나의 설득을 견뎌내지 못하고 파견근무의 형식으로 제주행을 허락해 주었다. 6개월 간의 파견근무 일정은 구두로만 성립이 되었다.


물론 내겐 그들이 저항할 수 없는 명분이 하나 있기도 하였다. 고문헌 속에도 삼국시대 제주 해녀들이 진주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절대적인 공동체윤리를 바탕으로 하는 해녀문화는 어쩌면 한반도에서 최초의 노동자연맹이었을 수도 있다. 연실과 내게는 해녀들의 연대에 관한 연구가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다시 제주공항에 도착했을 때 최진은 덜컹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지 않았다. 노총의 이름이 새겨진 승합차에 최진은 나의 트렁크들을 먼저 실었다.


승합차를 운전하면서 그가 연신 미소를 짓고 있었다. 최진과 연실이 처음 만났던 건 국제 대학생 환경 포럼이었다. 불과 이십여 년 전 해도 세상은 환경 문제에 크게 민감하지 않았다. 어느 NGO단체에서 주관했던 환경 포럼이 독일에서 열렸을 때, 나는 그날 맹장이 터져서 비행기에 탑승하지 못했었다.


나는 최진의 미소를 옆으로 흘깃거리면서, 이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우스운 상상을 해보았다. '내가 그날 맹장이 터지지만 않았더라면, 저 사람과 나는 지금쯤 무엇이 되어 있을까? 부부, 아니면 오래된 연인, 후훗, 어쩌면 이혼 커플?'


준영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준영과는 다른 세상에서 혼자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최진을 바라볼 때면, 같은 방향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하나의 길 위를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그려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내 생에 처음으로 나의 '공적인 신념'과 상관없는 결정을 하고 제주로 내려왔다. 최진이 제주에 머물러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와 함께 제주에 있고 싶었다.


연실은 해녀문화에 관한 나의 연구가 순전히 핑계일 뿐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속을 천만번도 넘게 드나든 사람처럼, 연실은 나의 제주행을 적극 지지했었다.


"한참을 잠수했다가 물 위로 나오면서 해녀들이 참았던 숨을 내뱉는 소리를 '숨비소리'라고 한다네. 그건 그네들의 생존을 알리는 장엄하고 처연한 소리지. 그런데 그게 말이야, 해녀들에게서만 나는 소리가 아니란 말이야. 노동자들에겐 다들 그들만의 숨비소리가 있어. 노동자들이 그 소리를 내도록 도와주는 게 바로 우리 연맹이 하는 일이지 않겠나?"


연실이 일전에 숨비소리에 관한 말을 꺼냈을 때 문득 나는 준영을 떠올렸다. 나는 준영과의 관계에서 늘 숨을 참고만 있었던 것 같았다. 준영은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 같았고, 나는 차가운 바닷속에서 떠오를 때만을 기다리며 숨을 참고 있었다. 숨을 참기만 하고 내뱉지 못한다면, 언제고 죽을 운명인 것은 틀림없지 않은가. 준영과의 관계의 결말은 예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연대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겠죠?" 나는 최진의 오뚝한 콧날을 바라보며 쾌활한 어조로 물었다.


최진은 느닷없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대는 가족이에요. 그래서 맨날 연실누나가 노동자들과 밥도 같이 먹고 마음도 같이 나누라고 신신당부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리곤 잠시 최진은 말을 삼키는가 싶더니 이내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연우씨, 나와 함께 미국 가지 않을래요? 미국에도 노동자 많아요~"


'미국에도 노동자 많아요'라고 내뱉으면서 최진의 말끝은 한결 더 진지해져 있었다. 노동자가 많다고 한 최진의 말은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어요'라는 뜻이기도 하였다. 나는 최진의 진중한 그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국에는 금이 많아요~"라거나 혹은 "미국에는 아름다운 비치가 많아요"라는 문장 대신에, 그가 선택한 단어는 "노동자"였다는 게 언뜻 듣기에 매우 희극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차들이 느긋하게 달리는 도로 옆으로, 바다 위에 검은 돌들 사이로 주황색의 공들이 여러 개 떠있었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었다.  


아직 최진의 입에서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미국에도 노동자 많아요"라고 한 최진의 음성 속에서 비슷한 음률이 들린 것도 같았다.


"최진씨, 당신부터 우리 사랑 연대(連帶)의 자발적 노동자가 되어준다면요~"


붉게 물들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최진이 운전하는 승합차가 멈추지 않고 천천히 달렸다. 승합차 측면에는 제주 지부 노동자의 책방을 알리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저 멀리 하늘 끝과 맞닿은 언덕 위에 작은 오두막 하나가 보였다. 그곳엔 매일 밤 함께 잠에 들었다가 아침을 맞이하는 평화로운 가족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나도 아주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런 오두막 하나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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