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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Nov 20. 2023

타인의 오두막 후기

사실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는 비트겐슈타인이 아니다. 언어와 기호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철학은 생태적으로 나와 맞지 않는다. 나는 잠시의 유희를 위해 언어를 기호화하는 것을 간혹 즐길 뿐이다. 아, 유희라는 말을 쓰니까 내가 매우 감각적인 인간으로 비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감각적이기보다는 사변적인 인간 유형에 가깝다.


내가 소설이라고 끄적거리는 몇 개의 작품 속에서 성(性)적 상태의 흥분을 묘사하기 위한 나름의 문장들을 애써 나열하다 보니, 혹자는 <도라지>를 매우 감각적인 사람 나아가 쾌락적인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글쎄다, 애초에 붓다와 중생은 구별이 없다 하니 나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혹은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말이 진실일 것 같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분석철학은 황망하게도 내게 심히 과분하여 어울리지 않지만, 적잖이 분석적인 두뇌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부정하긴 어렵겠다.


이번 <타인의 오두막>은 부적절한 사랑을 진행시키고 있던 한 돌싱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혼은 '흠'이 아니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선 가정 있는 남자를 만나고 사랑하는 건 '흉'이 될 수 있다. 조연우는 그런 의미에서 흠이 없는 여자지만 흉이 있는 여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조연우의 그러한 '흉'은 의도된 바 없는 무목적성의 사랑이기도 하다. 최후에 도달할 곳이 없는 사람의 사랑은 진짜 사랑이기가 쉽다. 소위 '사랑'이라는 항해를 통하여 도달하고자 하는 항구를 흔히들 '결혼'이라고 부른다. 준영과 결혼이라는 항구에 닻을 내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나긴 항해를 이어가는 연우의 곁에는 항해를 멈추고 돌아오라고 말하는 연실과 지혜가 늘 함께 있지만, 연우는 그들의 끊임없는 요청에 아랑곳하지 않고 위험한 항해를 계속한다. 그것은 마치 준영과 처음 만났던 날의 태풍과도 같았다.


그 태풍을 멈추게 한 것은 연실과 지혜의 간절한 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연우의 내면에서 들려온 소리 없는 균열은, 준영이 연우의 직업을 부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노동조합 총연맹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것에는 언제부터인가 '투쟁'과 '집회'라는 언어들이 매달려있다.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노동자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끝내 심성적으로는 노동자의 삶과 자신을 분리하기 일쑤다. 연실과 연우와 최진은 심성적으로 노동자의 삶과 자신들을 분리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연우는 구태여 자신의 생각과 삶의 길을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최진에게서 편안한 동반자의 느낌을 얻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인생의 동반자로서 미국행 비행기에도 함께 탑승할 것만 같다.


지향이 있는 한 인간은 방황한다고 했던가. 최진을 만난 연우가 더 이상 사랑으로 인하여 방황하지 않기를 바란다. 시시한 글이지만 나는 글을 쓸 때는 방황하지 않는다. 지향점을 분명하게 알고 가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아예 지향점이 없기 때문인 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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