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고부터 밤마다 잠들기 전에 거실 창문을 닫는 걸 잊지 않았다. 추운 겨울처럼 창문을 끝까지 꼭 닫는 것이 아니라, 비가 와도 거실 안으로 들이치지 않을 만큼의 공간은 어느 정도 남겨두고 창문을 닫는다.
그렇게 단도리를 하고 잠이 들었다가도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후두둑 후두둑 빗소리가 잠결에 들려오면, 얼핏 잠이 깨기는 하였지만 예전처럼 구태여 일어나서 창문을 확인하진 않는다. 죽고 사는 일이 아니면 이제 어지간한 실수들은 쿨하게 넘기며 살기로 다짐했었다. 어차피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 가는 일 자체가 우연과 실수의 이중주(duet)가 아니던가.
밤의 시간 중 그 어느 무렵엔가 다녀갔던 빗물의 자국이 창틀 샷시에 고여있는 걸 확인하며, 나는 아침마다 지난밤의 강우량을 어림해 본다. 눈부신 햇살이 거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작은 공원의 초록빛 수목들 사이로 상쾌한 7월의 바람을 데리고 오는가 싶다가도, 금세 햇살은 사라지고 바람만 우두커니 공원에 남아있기도 했다. 무언가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감돌다가도 어느새 쏟아지는 격정으로 치달아오르는 계절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그걸 장마철이라 부르고, 나는 그걸 듀엣 시즌(duet seas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접은 우산을 한 손에 들고 챙이 깊은 모자를 눌러쓰고 바람보다 옅은 햇살이 슬며시 기웃거리는 거리를 걸어 치과로 향했다. 코로나 때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던 치과에 작년에 찾아갔을 때, 의사 선생님은 심각한 어조로 오래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 달 간격으로 나의 치아 상태를 확인하다가 이제는 6개월 간격으로 치과에 오라고 했었다.
뚜렷하게 잘 생긴 사랑니 덕에 내게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개의 치아가 더 많은 셈이라서 생존에 매우 유리한 편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성실하게 잘 관리하면 죽을 때까지 영구적으로 내 치아를 사용할 수 있는데, 지금 내 칫솔질이 잘 생긴 치아를 소홀하게 대접하고 있다는 의견을 덧붙이며 그는 밉지 않게 나를 혼냈다.
치과의 움직이는 의자에 누울 때마다, 나는 가본 적도 없는 호텔 카바나의 선베드를 상상하곤 했다. 3층에 위치해 있는 치과의 넓은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저 구름이 흘러가는 곳의 어디엔가 언니들이 살고 있을 것이다.
지난번 면회 갔을 때 보았던 언니들의 썩은 치아가 떠올랐다. 정신 병원에선 환자들의 정신에 관한 진료와 간단한 소화불량 등의 증세에만 관여할 뿐, 그 외에 어떠한 병증에도 관여할 수가 없다. 외부에서 타 과목의 의사가 방문하여 진료할 수도 없으며, 오로지 환자 보호자가 외부로 데리고 나가서 치료를 하고는 다시 병원으로 복귀시켜야 하는 시스템이다. 환자가 외부로 나갔다가 하루만 넘겨도 퇴원 후 다시 입원하는 절차를 밟아야 하므로 병원에 입원 중 치과 치료 등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다.
나는 썩어가는 언니들의 치아를 떠올리며 눈물 대신 차라리 한숨을 지어보았다. 늙고 병든 부모님을 돌보느라 진이 빠져있는 내가 언니들의 썩은 치아까지 돌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잘 생긴 이빨들 사이로 기계음이 들려왔다. 의사 선생님의 말처럼 내 이빨들에게도 소홀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의사쌤이 몇 번이나 가르쳐주신 칫솔질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리라. 튼튼한 내 이빨로 골고루 음식을 섭취하여 내 건강한 생존의 시간을 늘려서, 부모님을 잘 돌보아드리고 가끔은 언니들이 살고 있는 병원에 소풍처럼 면회를 가는 일이다.
우산은 들고 왔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다. 지역별로 비가 내리는 시간도 다를 게다. 언니들이 지내고 있는 그곳엔 창밖으로 어쩌면 비가 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이불을 빨아서 거실에 널어놓고 왔는데, 햇살이 짱짱해서 이불이나 잘 말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