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지금 있는 것은 삶이지만, 그 인생에서 짊어진 각자의 무게는 도무지 비교가 불가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가끔은 내 인생의 무게가 유독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난 여전히 충분히 지쳐있으니 조금 더 쉬어야 할 것 같다가도, 아니면 얼추 기력을 회복해서 다시 일어날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쩝, 묘하게 엇갈리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그냥 오늘은 몇 달 만에 브런치에 글을 쓴다.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별스러운 것들이 늘 헷갈렸다. 언젠가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 아닌 기계의 명령어에 따라 직장에 일을 나가거나 혹은 집에서 쉬기를 권유받거나 할 때가 도래하겠지만, 신체 기능과 마음의 상태까지 파악해서 나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아는 성서 속에 예언된 구세주가 아니라, 아마도 AI가 될 것이라는 나의 예감이 지나치게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 진짜 문제가 아닐까 싶다.
윤리적 지침마저 계량화되고 수치화되는 세상에서 아직 오십 대를 살고 있는 나는, 남들이 보기에 일명 "효녀"라는 또 하나의 폭력적 프레임에 갇혀 있는 꼴이 되었다. 물론 그 프레임은 언제고 내가 개박살낼 수 있는 허깨비 울타리라는 것을 모르지 않으며, 그 허깨비를 숭상하지도 않는다. 아직 내 안에 남아있는 연민의 마음이 부모님을 향하여 작동하고 있기 때문일 뿐, 그 연민의 버튼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을 때 나의 "효녀"라는 닉네임은 곧바로 "불효자"로 탈바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기사 '존속 폭행' 정도는 되어야 불효자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는 것이지, 요즘은 불효자라는 타이틀이 사라진 거나 다름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폭행은 고사하고 제 집에서 부모를 모시고 살면서도 잘 모시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불효자는 웁니다~"라고 했던 표현은 다 옛말이 되었다.
늙은 부모님을 6년째 돌보고 있는 나를 세상 사람들이 효녀라고 지칭하지만, 실질적으로 나는 효녀는 결코 아니다. 이것은 겸양의 표현이 아니다. 부모님을 돌보고 온 날이면, 나는 남편에게 "늙으면 죽어야 돼. 곡기를 끊어야 된다"는 말을 얼마나 자주 했던가.
어떤 날은 마치 깎아지른 절벽에 세워진 암자에 홀로 기거하는 수도승의 마음인 양, 모든 것이 저절로 흘러가고 내 마음은 그저 구름과 바람이 흐르는 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없지 않다. 그러다가도 문득 성난 바람이 높은 바위를 만나 커다란 소리를 내며 부딪히듯이 일순간에 벌컥 화가 날 때가 있는데,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무얼 해도 나의 머릿속과 어긋나기만 하는 날~ 하필이면 그날이 오늘이었고, 나는 그래서 안 쓰던 글을 쓰게 되었다. 나무아미타불~
막내딸이 부모님 댁 청소기를 돌리고 낡은 세탁기를 청소하고 철 지난 옷가지들을 정리하는 동안, 늙은 부모님은 각각 안방과 거실에서 기도문을 읽으며 주절주절 연신 쉬지 않고 소리를 내었다. 오래된 김치 냉장고 위에 손질하지 않은 아욱이 한 봉지 그대로 놓여 있고, 주방 바닥엔 샤인머스캣 포도 알이 하나 굴러다녔다.
저분들이 이 세상 잘 마무리하고 저승길 떠나려면 아직 멀었는가, 나도 늙어서 이제 곧 육십인데 늙은 부모는 아직도 나를 젊은 막내딸로만 바라보고 계시는 것 같다. 아직 젊어 보이는 엄마(me)가 집안을 보살피고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 철 모르는 구십 부모님이 대여섯 살 아이들처럼 성격책을 가지고 기도하며 놀고 있었다. 나는 기도문을 외는 그 소리도 듣기가 거북해서, 가을 아욱 가지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부모님 댁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차에 올라타면서 이내 부모님 집에 있던 가을 아욱이 아쉬웠다. 가을 아욱은 사립문 닫고 먹을 만큼 좋은 거라는데, 노인네 둘이서 드시기에 많아 보였지만 심술이 난 내 마음에 아욱이 이뻐 보일리가 만무였다. 가을 아욱 드시고 두 노인네가 조금 더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는 건지 아닌 건지,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처럼 내 마음이 나도 모르게 너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