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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기저귀

by 도라지

육이오 한국 전쟁 때 막내 여동생을 업고 피난길에 올랐다던 어머니는 외가 친지들 가운데서도 유독 극성스러운 데가 있는 분이다. 어머니 위로 네 명의 이모들과 아래로 한 분의 이모와 외삼촌이 계시지만, 우리 어머니는 우람한 체격에서나 성정에서나 이모들과는 극명하게 도드라지는 면을 갖고 있다.


그런 어머니의 독불장군 같은 고집과 무지로 인해 어머니의 두 딸들이 정신 병원에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반면에 어머니는 두 딸의 정신병원 행은 오롯이 당신 남편의 죗값과 남편 쪽 조상들이 지은 업보 때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 굳건한 믿음은 때로 어리석음 위에 반석을 세우기도 하듯이, 어머니의 기괴한 믿음은 예수가 재림하여 진실을 설파한다고 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성벽이다.


불과 두 해 전만 해도 걷지를 못해서 내가 미는 휠체어로 간신히 이동을 했던 어머니는, 혼자서 바닥을 쓸듯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올해 김장을 하겠다고 다시 소란을 피웠다. 그랬다, 그것은 내 입장에선 '소란'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재작년에는 며느리가 담가다 준 김장 김치에 들어간 고춧가루가 햇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타박을 하셨다. 그 후로 새언니는 김장은커녕 반찬도 만들어 드리기가 부담스러워졌을 것이다. 작년에는 내 친구가 교회에서 정성껏 담근 '불우이웃 돕기 김장'을 가져다 드렸더니 어머니는 일말의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출처를 밝히기 위해 김치통 윗면에 붙여 놓은 <불우이웃 돕기, ()()() 교회> 스티커를 제거하지 않은 나의 실수였다.


물론 어머니는 고작 두세 포기의 김장김치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지만, 그러한 선언 뒤엔 든든한 조력자(me)가 대부분의 일을 감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내린 결단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 조력자가 약속한 날에 하필이면 장염에 걸려 밤새 변기 위에 앉아있을 만큼 상태가 위중했다는 것이 오해의 발단이었다.


절인 배추 두세 포기가 배송 날짜에 집에 배달되어 오자, 장염으로 인해 조력자를 잃어버린 두 노인네가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김장을 담그고 난 다음 날이었다.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막내딸이 이상하다고 걱정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장염을 감기로 알아듣고 막내딸이 감기에 걸려 못 온다고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전달하였고, 아버지는 그깟 감기쯤이야 약 먹고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일손이 꼭 필요한 때에 오지 않은 막내딸을 오해한 아버지는, 멀쩡한 줄로만 알았던 막내딸마저 급기야 두 딸들처럼 정신적으로 이상 증세가 있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우셨을지도 모르겠다. 하기사 나도 불안증과 불면증 등으로 온전히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일부러 노인네들을 골탕 먹이려는 의도를 가질만큼의 비상식적인 사람도 아닌데, 이래저래 씁쓸했다.


장염으로 설사가 심해서 변기 위에 앉아 몇 시간을 보내고 난 그날 밤에, 나는 서랍 속에 넣어두었던 어머니의 기저귀를 찾아 속옷 대신 착용하였다. 꼬박 이틀 동안을 어머니의 기저귀까지 차고 지내야 했을 정도로 고생했던 나의 속사정을 나는 부모님께 일일이 설명드리지 않았다. 당신들의 '엄마'처럼 의지하고 있는 막내딸이 언제나 젊고 건강하고 다정하길 바라는 부모님의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몇 년 후면 육십이다.


막내딸마저 위의 언니들처럼 정신 이상이 오면 어쩌나, 아버지는 딸들에게 내려앉은 일종의 저주와 같은 정신병이 막내딸마저 삼켜버릴까 늘 불안해하고 계시는지도 모르겠다. 아, 우리에겐 언제쯤 평화가 찾아올까?


해마다 성탄절을 앞두고 기적 같은 일(언니들의 쾌유)이 벌어지기를 바랐던 나의 삼사십 대 시절 속에서 아버지는 총명하고 활력이 넘치셨는데, 이제 그런 아버지는 온데간데없고 쇠약하여 말라버린 늙은 신체 하나와 불안한 눈동자 두 개가 나의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비쩍 마른 아버지의 신체처럼 비에 젖은 낙엽들이 서로 뒤엉켜 가을을 떠나보내는 거리의 나무들 사이로, 올해도 어김없이 성탄절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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