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선희가 등교하자마자 우리 교실로 쪼르르 달려왔다.
"이서은, 어제 그 애 누구냐?"
우리 반 아이들이 눈치라도 챌까 봐, 나는 얼른 선희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너 괜히 호들갑 떨지 말아라~ 국민학교 동창이야. 내가 서울로 대학 가면 영영 못 볼 거 같아서 왔단다."
아니나 다를까 그새 선희는 옆반 재일이한테까지 소식을 전했나 보다. 재일이가 복도를 가로질러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고? 서은이 남자 친구가 학교 앞으로 찾아왔었다고? 이서은, 너 쫄보인 줄로만 알았는데 간 크구나~큭큭"
선희와 재일이가 동시에 큭큭거렸다. 재일이 말대로 나는 쫄보가 맞다. 학교 담장을 넘을 수 있던 것도, 말타기를 할 수 있던 것도 다 재일이가 있어서 가능했다.
"남자 친구 아니라구~ 그냥 국민학교 동창생이야."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내가 해명하려고 하자, 재일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한다.
"그래, 너한테는 걔가 그냥 동창이라고 치자. 그런데 걔한테는 니가 첫사랑이라고 그러던?"
귀신같은 기집애, 재일이는 어젯밤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훤히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구태여 부정해봤자, '오냐, 니 말대로 받아주겠다' 할 애들도 아니었다. 나는 있는 사실 그대로 다 말해주었다.
"에이, 시시해라~ 그럼, 대입시험 끝나고 나서야 연락이 오겠네. 반년도 더 남았는데, 걔는 남자애가 왜 그런다니? 밀어붙여야지~"
선희는 뭘 좀 안다는 듯, 남녀 간의 연애 코칭 전문가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어제 잠깐 봤는데도, 그 남자애 싸움 좀 할 거 같던데~"
선희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예리한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선희는 재일보다 어쩌면 한수 위인지도 모른다. 작은 얼굴에 길쭉길쭉한 팔다리며, 군살 하나 없는 매끈한 몸매에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선희는 누가 봐도 미인이었다. 시끄러운 목소리는 그녀가 입만 열지 않으면 감추어진다. 선희 아빠 교회에 나오는 신도들 중에는, 선희를 보러 교회 오는 남학생 수가 더 많다고 들었다. 귀신같은 기집애들~ 점쟁이가 따로 없다.
"그거야 난 모르지. 어제 잠깐 얘기 나눴을 뿐인걸~얘들아, 1교시 바로 운동장 소집이잖아, 자, 각자 교실로 해산~"
선생님들은 우리더러 체육복 입고 등하교하지 말라고 늘 신신당부하셨다. 그런데도 재일인 벌써 체육복 차림이었다. 동작이 빠른 건지, 속에다 체육복을 받쳐 입고 온 건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때는 선생님들의 주의가 마냥 귀찮은 잔소리로만 들렸었다. 체육복에 버젓이 찍혀있는 학교 마크와 학생 이름이 혹시라도 우리에게 해롭게 작용할까 봐 우려하셨다는 걸, 어린 여자애들은 알지 못했다.
남학생들은 교련복을 따로 입었겠지만, 여학교에선 체육복을 입고 제식 훈련을 했었다. 민주주의 국가의 신성한 학교에서 일제의 유물을 계승하는 정신이라니, 참 기막힌 시대를 살았었다.
키가 큰 재일이가 팔에 노란색 완장을 차고 학생들 선두에 섰다. 어제저녁, 1학년 때 담임 선생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리던 재일이는 온데간데없고, 우렁찬 목소리로 재일이가 씩씩하게 걸었다. 체육복을 입은 여자애들이 재일이 뒤에서, 마치 군인들처럼 절도 있게 교단 쪽을 향해 거수경례를 했다.
제식 훈련이 끝나고 각 학급별로 줄을 서서 운동장 한쪽 끝에 진을 치고 앉았다. 흙바닥이었다. 여자애들은 흙바닥에 앉아 시끄럽게 떠들다가도, 운동장에 고적대가 웅장한 악기 소리를 내며 등장하면 모두가 조용해졌다.
고적대는 우리 학교의 자랑이며 명물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같은 여고생임에도 그녀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언니 같았다. 모두들 늘씬한 몸매에 화장까지 한 얼굴에선, 여자의 향기가 물씬 풍기곤 했다. 고적대는 야간반 학생들 가운데 뽑혀서 구성되는 게 우리 학교의 전통이었다. 오색찬란한 옷을 입고 봉을 휘두르는 고적대 대장은, 지역 내 고등학교 남학생들 사이에선 최고의 우상이며 연예인으로 통했다. 고적대 누구 때문에 어느 학교 남학생이 자살했다느니, 그런 허황된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선희는 고적대 애들이 부럽다고 했었다. 공부는 뒷전인 채, 예쁜 옷을 입고 여기저기 공연하러 다니는 게 부러웠나 보다. 그렇다고 멀쩡히 다니던 학교를 야간반으로 옮겨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선희 아빠 목사님께서 너그럽긴 하셨어도, 고적대 하려고 야간반 가겠다 하는 것까지 허락하실 분은 아니었다.
제식훈련과 고적대 공연이 끝나고 모두가 각자의 교실로 들어갔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내일 토요일도 오전 수업이 있지만, 우리는 금요일 점심부터 주말 분위기에 설레어 있었다. 미경이가 다 읽은 로맨스 소설을 내 책상 서랍에 넣어 놨다. 이 편이 그 소설의 마지막 권이었다. 쉬는 시간을 틈타 열심히 읽고 있는데, 수정이가 쪽지를 보내왔다.
<내일, 토요일 오후 4시, 제일 교회 청소년회관, 청소년 문화제, 준영이도 출연. 너도 갈래?>
(2021년 10월 11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