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너머로 캄캄해진 하늘 저 멀리 별들이 몇 개 빛나고 있었다. 육 년 만에 만난 남자아이가 나를 첫사랑이라고 고백한다. 순간 당황해서 놀라긴 했지만 가슴이 뛰거나 설레지가 않았다. 둘 사이에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진태의 붉어진 얼굴이 아직도 발그레했다. 나는 진태의 고백을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소연이가 잘못 알았나 봐. 서울로 대학 가고 싶어도 실력이 그만큼은 아니야.."
큰언니와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아버지께서도 며칠 전에 내게 비슷한 질문을 하신 적이 있었다. 너도 서울로 대학을 가고 싶으냐고 물으셨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 큰언니는 전교 1, 2등을 다투었다고 했다. 사립학교라서 큰언니를 기억하시는 선생님들이 아직도 계신다. 그리고 큰언니는 서울로 대학을 갔다. 하지만 나는 반에서 겨우 2, 3등을 다툰다. 이 실력으론 서울에 이름난 대학을 가기는 힘들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집에서 가까운 국립대 진학해서 아버지 짐을 덜어드리고 싶다고 했다.
서울로 대학 가지 않을 거라는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태가 천진한 표정으로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진태 너도 대학 갈 거지?"
차분한 얼굴로 내가 물었다.
"당연하지. 나도 꼭 대학에 갈 거야. 서은아, 대학 합격자 발표난 뒤에 내가 다시 연락해도 되니?"
짙은 눈매와 굵은 턱선을 한 진태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한 순간 그 아이의 얼굴이 강한 남자로 느껴졌다. 멀쩡했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그의 말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재빨리 그의 시선을 피하며 내가 가늘게 대답했다.
"그래,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애~"
그때였다. 저쪽에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혹시 서은이 아니니? 목소리가 서은이 같은데~"
지팡이를 짚고 서있는 기승 오빠가 다섯 걸음쯤 앞에 서있었다. 흐릿한 불빛 사이로 그의 몸이 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찌 된 영문인지 지팡이 두드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었다.
"네, 오빠. 저 서은이 맞아요. 잠깐 친구랑 얘기하느라 여기 서있었어요."
지팡이를 짚은 남자를 향해 내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진태가 약간 놀라는 듯이 보였다.
"여기는 저랑 국민학교 동창 송진태, 이쪽은 여기 학교 학생 박 기승 오빠~"
남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어색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서로에겐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 서 있는 기승 오빠의 표정을 진태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기숙사의 불빛이 밝지 않았다.
"나는 잠깐 산책 나왔어. 서은이도 이제 곧 집에 갈 시간이지? 조심히 들어가고~ 진태 씨도 안녕히 가세요."
기승 오빠가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오던 길을 되짚어 다시 기숙사 쪽으로 향해 갔다.
"진태야, 나도 교실로 들어가야 해."
진태는 점잖게 나를 에스코트하며 맹학교 교문 앞까지만 바래다주었다. 진태는 다른 말들로 나를 붙잡아 두려 하지 않았다. 솔직하고 사내다운 느낌이었다. 내게 우리 집 전화번호도 묻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교실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정류장에도 진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몇 달 후에 다시 연락하겠다며, 그날 진태는 운동선수같이 단단한 수컷의 모습으로 잠깐 학교 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2021년 10월 10일 씀)